우리나라 최초 개신교 순교자

▲ 사진출처= 픽사베이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지난 회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순교자인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 신부에 대해 설명을 했다면 이번 회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개신교 순교자인 로버트 토머스 목사를 설명하고자 한다.

로버트 토머스 목사는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런던대학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하노버 교회에서 24세의 나이로 목사 안수를 받고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상해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내가 곧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토마스 목사는 이에 충격을 받고 선교사의 꿈을 내려놓고 산동성 지푸세관에 들어가서 일을 하던 중 스코틀란드 성서공회의 알렉산더 윌리엄슨을 만나 다시 선교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그런데 산동성으로 피난을 온 조선인 천주교인 2명을 만나 조선 선교의 뜻을 품에 됐고, 조선으로 가는 배편을 찾아 조선으로 와서 황해도 여러 섬을 돌아보았다. 그중 창린도에서 두달 반을 머물면서 조선어를 습득했고 한양으로 가서 선교를 하는 꿈을 갖고 한양으로 향하지만 풍랑을 만나 꿈을 접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어 다시 조선으로 향하는 배편을 구하던 중 프랑스 로즈제독이 군함을 몰고 조선으로 간다고 해서 조선으로 가려고 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조선으로 교역을 위해 떠난다는 미국 국적 상선 셔어만호가 있어서 그 배의 통역 자리로 승선을 하게 된다.

셔어만호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이르게 됐고, 셔어만호를 제재하려고 나온 관리를 통해 평양감영에 통상을 요구했지만 평양 관리는 거절했고, 퇴각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평양 관리와 주민들은 식량을 구해 셔어만호의 승무원들에게 제공을 하기도 했다.

셔어만호는 통상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받아들여질 때까지 돌아갈 수 없다면서 머무르면서 정찰선을 띄워서 대동강 상류를 살펴봤다. 이때 조선의 중군 이현익이 이끈 조선군의 배가 대동강을 오르내리면서 셔어만호의 동태를 감시하게 된다.

얼마 후 셔어만호에서 이현익에게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하자 이현익은 혼자 승선을 하게 되는데 셔어만호에서 이현익의 인신(印信 : 관리의 신분증명서)를 빼앗고 인질로 잡아들었다.

이것이 조선군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쌍방간 총격전이 일어나고 셔어만호는 후퇴를 하기로 했다.

이때 셔어만호의 선주와 통역이 내려와서 탈취한 인신을 돌려주고 항복서를 써서 올리면 자신들을 살려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조선의 관리는 셔어만호 선원 모두 하선해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셔어만호의 선원들은 그 답을 듣고 무슨 이유인지 배에 실린 대포로 조선군을 향해 위협사격을 하게 됐다.

이에 조선군은 분노해 불을 지른 장작을 실은 작은 배를 셔어만호로 보내 셔어만호를 전소시키게 된다.

선원들은 셔어만호가 전소되자 대동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강가로 올라왔지만 기다리던 조선군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 됐다.

토마스 목사는 물에 뛰어내려 성경을 갖고 강변으로 올라와 조선인에게 전해주려고 했지만 퇴역장교인 박춘권이 휘두르는 칼에 순교를 하게 된다.

토마스 목사는 셔어만호가 평양의 대동강 강가에 머무르는 동안 틈틈이 평양 주민들에게 성경을 전해주면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토마스 목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중국에 있을 때 조선 선교의 뜻을 품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조선으로 입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교를 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또한 다른 일각에서는 토마스 목사의 순교로 인해 평양이 개신교가 발달을 하게 됐고, 이후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평양이 개신교의 땅이 됐다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그 평양의 개신교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개신교의 뿌리가 됐다는 것이다.

토마스 목사를 처형한 박춘권은 훗날 기록에 자신이 죽인 서양사람 중 한 사람은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두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받으라고 권유했다고 했다.

박춘권은 이 성경책을 받았다고 기록 했다. 또한 군중 속 한 명인 12살 최치량이라는 아이는 토마스 목사가 주는 3권의 성경을 받아들고 겁이 나서 한권을 포졸에게 줬는데 그 포졸은 성경을 찢어서 벽을 도배했다고 한다.

훗날 박춘권의 조카 이영래가 그 포졸집에 들렸을 때 성경이 벽지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개신교로 귀의를 하게 됐고 훗날 한국인 성서 번역의 한 사람이 됐다고 한다. 또한 박춘권 역시 안주교회 장로가 됐다.

이처럼 토마스 목사는 이땅의 개신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순교를 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워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