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귀화인에게 관대한 나라였다

▲ 설장수가 살아있을 당시를 묘사한 KBS 1TV 드라마 '정도전'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설장수라고 하면 무슨 ‘장군’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설장수(偰長壽)’는 여말선초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외교관이다.

설장수는 귀화한 위구르인이다. 위구르는 중국 서북쪽 지방으로 유목민족이었다. 동양인의 생김새보다는 서양인의 생김새에 더 가깝다. 10대 후반에 아버지인 백료손(伯遼遜·설손)이 고려에 귀화하면서 이 땅과 인연을 맺게 된다.

공민왕은 왕자 시절 원나라 수도에서 황태자에 대한 시종을 맡고 있었는데 황태자 교육기관에서 백료손과 어울려 지냈다고 알려졌다.

고려 말기 홍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어려워지자 백료손은 가족들과 함께 공민왕이 다스리고 있던 고려로 귀화한다. 공민왕은 옛 친구가 왔다고 반기면서 봉토를 하사하는 등 우대를 해준다.

백료손의 장남이었던 설장수는 귀화 당시 10대 후반이었는데 몇 년 뒤 과거시험에 합격하면서 관직생활을 하게 된다.

위구르어, 중국어, 몽고어에 능통하면서 외교무대에서 큰 활약을 펼치게 된다. 우왕 시절부터 명나라를 드나들며 명나라와 무난한 관계를 맺는데 성공을 하게 되면서 점차 고위급 관리로 성장하게 된다.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내쫓고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옹립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이때 조준, 정도전, 정몽주 등과 함께 설장수도 가담을 했다. 설장수는 정몽주와 함께 고려를 개혁하자는 쪽이었다.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고 조선이 창업되면서 설장수는 정치적 위기에 놓이게 된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이색, 우현보 등과 함께 설장수를 처벌하라고 건의를 한다.

하지만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이들을 귀양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를 한다. 설장수는 반년도 안돼 귀양에서 풀려났고, 외교관 양성기관인 사역원 창설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만큼 설장수를 대체할만한 외교 전문가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정도전의 끊임없는 견제가 있었지만 종 1품 판삼사사에 임명된다. 또한 태조는 설장수가 계림(경주)을 본관으로 삼게 해줬다.

명나라는 조선이 요동정벌을 꾀한다면서 그 실세인 정도전을 소환하라고 통보했지만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이에 권근과 설장수가 명나라 황제를 찾아가 오해를 풀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역시 설장수를 계속해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장수는 태종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하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명나라를 찾아가 정종 즉위 승인을 받아오면서 외교관으로 활약을 하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설장수는 모두 8번 명나라를 다녀왔다고 기록돼 있다.

설장수는 정종이 즉위한 1399년 명나라를 다녀왔고 59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조정은 조회를 정지하고 직접 장사를 지내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준다.

그만큼 설장수는 조선에 미친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구르인으로 조선땅에 들어와 조선의 안정되게 할 수 있도록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은 이런 위구르인에 대해 거부감을 갖지 않고 고위 관료로 승진시키는 등 오늘날 우리보다도 더 귀화인들에게 관대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오늘날 귀화한 외국인이 외교부 장관에 오른다고 했을 때 과연 우리 국민은 얼마나 용납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흔히 조선을 폐쇄된 나라라고 하지만 조선은 오늘날 우리보다 귀화인들에게 더 개방된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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