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광종, 그는 왜 귀화인들을 대접했나

▲ 고려시대 광종을 다룬 KBS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 홈페이지 캡쳐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채인범은 중국 송나라 천주 출신이다. 37세 때인 970년(광종 21)에 송나라 천주의 지례사(持禮使)를 따라 고려에 와서 조정에 배알했다.

광종은 채인범을 고려에 머무르게 하고 관고(官誥)를 내려 예빈성(禮賓省) 낭중(郎中)에 임명하고 주택 한 채와 토지·노비 등을 하사했다.

채인범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한 인물이었다. 문장을 잘 지어 임금을 잘 보좌했다. 성종 때에는 상서예부시랑이 됐다.

998년(목종 1)에 65세로 사망하자 바로 그 해에 오관산에 장례를 지냈으며 예부상서로 추증됐다.

1009년(현종 즉위년)에는 상서우복야에 추증됐다. 사후 26년이 지난 1024년(현종 15)에 개성 법운산의 동쪽 기슭에 개장하면서 묘지명을 만들었다.

채인범은 이처럼 광종 사람이면서 고려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광종 시대 쌍기와 더불어 채인범은 귀화인으로 고려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고려 광종은 이처럼 귀화인을 우대했다. 귀화인을 우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통일신라 시대는 골품제 사회였다. 성골에 이어 진골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고, 6두품은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6두품과 호족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났다.

그 반발이 결국 후삼국 시대를 낳았고, 고려로 통일을 하게 됐다. 고려는 호족사회이다. 즉, 지방호족이 이제는 중앙권력자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6두품은 신분상승은 막혀있다. 6두품은 유학에 능한 학자들이 중심이었다. 때로는 중국에서 공부를 하는 등 유학에 상당한 눈을 뜬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6두품이 고려시대에 와서도 일부 인사들만 제외하고는 신분상승이 상당히 어려웠다.

이와 더불어 호족이 중앙권력을 좌우하면서 왕권은 약화됐다. 왕건 사후 혜종과 정종을 지나면서 호족들간의 권력다툼이 상당했고, 이로 인해 왕권은 무너졌다.

광종으로서는 호족들을 견제하지 않으면 왕권을 확립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면 중앙권력에 새로운 세력을 자꾸 유입시켜야 한다. 문제는 6두품 신분을 상승시키는 힘들었다는 것이다.

통일신라에서 6두품이 신분상승을 하지 못한다는 반발 때문에 통일신라를 무너뜨리고 고려왕조를 탄생시켰지만 여전히 6두품은 변방 세력에 불과했다. 호족들이 중앙권력을 장악하면서 6두품 즉, 유학자들은 상당히 푸대접을 받게 됐다.

하지만 그런 호족들도 귀화인에게는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광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새로운 세력을 6두품 대신 귀화인으로 선택을 했다.

쌍기와 더불어 채인범이라는 사람이 송나라에서 귀화를 해서 고려에서 높은 벼슬을 얻은 것도 이런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통일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중국에서 넘어온 귀화인들이 상당히 많다. 당나라 황소의 난을 피해 통일신라로 넘어온 귀화인도 많고, 송나라 시절에도 각종 반란 등을 피해 고려로 귀화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 성씨가 많이 나오게 된 시기도 이 시기이다. 통일신라와 고려 초 중국에서 귀화인들이 많이 발생하다보니 우리나라 성씨도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된 것이다.

채인범은 이런 고려의 상황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만큼 고려 초기에는 상당한 격변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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