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는 글로벌 국가였다

▲ 사진출처= 처용문화제 홈페이지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처용은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886년) 때 사람이다. 879년 헌강왕이 행차해 울산 개운포(현재 울산화학공단과 온산화학공단 사이 외황강 하구 지역)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생김새와 괴이한 의복을 입은 용왕의 아들이라고 자처한 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처용이라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왕을 따라 서라벌까지 왔다. 이에 헌강왕은 처용에게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달밤이면 나가 춤추고 노래하다가, 마침내 그 행방을 감춰 버렸다.

처용은 처용 설화로 유명한 사람이다. 처용은 한국 민간 전승과 무속신앙에서 신의 하나로 숭배된다.

처용이 출타 중인 사이 역신(질병을 전파하는 신)이 처용 아내와 동침을 했다. 처용은 이를 발견했지만 분노하지 않고 향가인 ‘처용가’를 노래 부르며 춤을 췄다고 한다.

그 인품에 감격한 역신은 처용이 있는 곳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고 사라졌다.

이에 고려시대 이후 새해 초나 질병이 돌 때 문 앞에 처용의 얼굴을 한 그림을 그려서 붙이면 질병이 전파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많은 사람들이 처용을 아랍인 혹은 페르시아인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처용 설화의 배경인 울산 개운포가 통일신라 시대 무역항으로 번성하던 곳이다. 많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개운포에 와서 신라와 국제무역을 했다는 것이다.

▲ 사진출처= 한국관광공사

그 증거로 경주시 괘릉을 가보면 무인상이 하나 있다. 그 무인상은 한국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이고 있다.

또한 경주시 용강동 무덤에는 문인상이 있는데 그것 역시 한국사람과는 다른 생김새를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가 아라비아와 교류를 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통일신라가 단순히 폐쇄적인 사회가 아니라 국제교류를 했던 글로벌 국가라는 것이 곳곳에서 증거로 나오고 있다.

실제로 2010년 발견된 쿠쉬나메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비틴이 페르시아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기항해 항구에서 신라왕 타이후르의 아들 가람의 영접을 받았으며, 왕정을 보좌하고 왕과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신라의 공주 프라랑과 결혼한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삼국유사에는 “개운포에서 자욱한 안개와 함께 헌강왕 앞에 나타난 자들이 동해 용왕과 일곱 아들이고 그 가운데 막내를 경주에 데려와 벼슬을 주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도록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쿠쉬나메와 삼국유사의 내용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통일신라와 아라비아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용이 아라비아에서 건너온 사람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통일신라가 폐쇄된 국가가 아니라 글로벌 국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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