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와 또 다른 신라 문화 양식들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고대 신라는 참으로 오묘한 국가였다. 박씨·석씨·김씨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던 국가이다. 고대국가이든 근대국가이든 현대국가이든 왕의 ‘성(姓)’씨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에는 정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신라가 박·석·김으로 성씨가 바뀌면서 왕위 계승이 이뤄졌는데 이에 대해 명확한 이야기가 역사적 기록에는 없다.

박혁거세로부터 출발한 신라는 4대 왕은 ‘석탈해’로 석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 그후 13번째 임금에서 김미추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곧바로 14번째 임금은 다시 석씨 성을 가진 유례 이사금이 정권을 잡았다. 그 이후 17대 임금인 내물 마립간이 정권을 잡았다. 내물 마립간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후 김씨가 왕권을 장악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안은 내물 마립간부터 왕의 호칭을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사안은 내물 마립간이 집권한 시기부터 무덤 양식에 ‘적석목곽분(돌무지 덧널무덤)’이 출현했다는 점이다.

즉, 4세기 신라는 상당히 많은 격변을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4세기 한반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서기 342년 흉노족의 일파인 선비족 모용황은 5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고구려 국내성으로 침공하기 위해서는 북로와 남로로 나뉜다.

남로는 험준한 산악지대라서 적군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침공로’이다. 때문에 고구려는 북로만 틀어막으면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모용황이 거꾸로 이용, 북로에는 1만 5천 군사를 보내고 자신은 주력부대 4만 군사를 이끌고 남로를 통해 국내성으로 침공을 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는 모용황이 북쪽으로 침략해올 것이라고 판단, 북로에 주력부대를 보냈다. 때문에 북로로 침공한 선비족들은 물리쳤지만 국내성이 함락되면서 대패했다.

문제는 북로로 쳐들어왔다가 패배한 1만 5천 선비족 군사가 어디로 갔느냐는 것이다. KBS 장한식 기자는 이 패배한 군사가 신라로 쳐들어와서 김씨 왕조를 만들었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내물마립간 즉, 석씨 왕조에서 김씨 왕조가 계속 이어갈 때쯤 ‘이사금’이라는 칭호에서 ‘마립간’이란 칭호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물마립간 이전에는 석씨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를 계승했다. 물론 석씨 왕조가 왕위를 물려받을 당시에도 김씨성을 가진 왕이 딱 한 번 출현하기는 했지만 주로 석씨성을 가진 사람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내물마립간 이후 김씨성을 사용하는 사람이 계속 왕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왕의 호칭도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때쯤을 기점으로 무덤양식의 변화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유물 역시 심상찮다.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사용하는 각종 제품이 유물로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말을 순장하는 형태 등도 있었기 때문에 신라 왕조가 과연 흉노족에서 왔는지 의심이 갈만한 대목인 것은 분명하다.

신라 기마인물상의 경우 청동솥이 말 뒤쪽에 달려있다. 이는 기마민족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로마양식의 유물에 대거 출토됐다는 점에서 신라가 단순히 폐쇄된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을 ‘김원종’이라고 하면서도 ‘모태(慕泰)’ 혹은 ‘모진(慕秦)’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법흥왕의 성과 이름을 모태 혹은 모진으로 표현하는 것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다른 역사서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대해 법흥왕을 김원종이라고 부르면서도 ‘모태’ 혹은 ‘모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용씨(慕容씨) 후손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모용씨가 신라로 흘러들어오면서 김씨로 성을 바꾼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말도 안되는 가설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돌무지 덧널무덤이 4세기 갑자기 출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도 덧널무덤이나 돌무지무덤 등이 발견됐다.

즉, 돌무지 덧널무덤은 이런 무덤 양식이 하나로 융합된 것뿐이지 유목민들의 무덤양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마유목민족과 관련된 유물들이 출토됐다고 신라 왕조가 흉노족일 가능성은 일종의 가설 즉, 참신한 상상력에 바탕을 둔 것이지 정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 양식의 유물이 대거 발견된 것이나 기마유목민족 양식의 유물이 발견된 것은 그만큼 대외적으로 활발한 교류를 했기 때문이지 신라 왕조가 선비족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아직까지도 과연 신라 왕조가 선비족의 후예인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대 왕국에서도 다양한 부족 이동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신라는 열린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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