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으로 귀화했지만 고향을 버리지 못한 사람

▲ kbs 1TV 드라마 '세종'의 한 장면. 배우 배성우는 이 드라마에서 '평도전' 역을 맡았다.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평도전은 조선 태종 때 조선에 귀화한 일본 사람이다. 1407년 궁중에 진상되는 고기, 소금 등을 관장하는 사재감의 원외사재소감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정 3품상호군까지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말년은 불운했다.

도전은 원래 왜인이었는데, 왜선을 협공하여 도전이 또한 적의 머리 3급을 베고 18인을 사로잡으니, 상왕(上王)께서 명하여 도전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게했다.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3월 16일 경오 1번째기사를 살펴보면 대마도 수호(對馬島守護) 종정무(宗貞茂)가 평도전(平道全)을 보내와 토물(土物)을 바치고, 잡혀 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정무(貞茂)가 무릉도(武陵島)를 청(請)해 여러 부락(部落)을 거느리고 가서 옮겨 살고자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나더러 반인(叛人)을 불러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하니, 남재(南在)가 대답하기를, “왜인의 풍속은 반(叛)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상사(常事)로 여기므로 금(禁)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계책을 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 경내(境內)에서는 상사(常事)로 여기지만, 만일 월경(越境)해 오게 되면 저쪽에서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이 기록에서 보다시피 평도전은 대마도 수호 종정무의 부하였지만 종정무의 부탁으로 조선 땅에서 살게 됐다. 그리고 정3품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평도전은 왜선을 만들어 한강에서 조선 병선과 그 속력의 빠르기를 비교해 보이기도 하고, 대마도를 오가며 조선국왕의 의중을 전하고 대마도주의 답변을 받아오기도 했으며 때로는 왜구의 침입을 물리는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 1년 태종의 주도하에 대마도 정벌을 나서게 되면서 평도전은 왜구 섬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된다. 평도전의 아들 평망고가 있었는데 조선이 대마도정벌에 나서기 전 삼남에서 거주 또는 숨어있는 왜인들 중 요주의 인물들 21명을 처단했는데 이때 평망고도 죽임을 당한다.

이 일로 인해 평도전과 그 가족들은 대마도주와 서로 내통했다는 죄로 평양으로 안치되고 만다.

이후 세종 8년(1426년) 12월 예조에서 임금에게 아뢰길 “평안도 양덕에 안치된 왜인 평도전은 생계가 어려워서 의복과 말 안장을 전당잡히거나 팔아서 조석 끼니를 이으며 그 딸은 나이가 장성했는데도 시집을 가지 못하고 있다”고 하자 세종은 그곳 수령으로 하여금 비용을 대어 평도전의 딸을 시집보내게 한다.

또한 세종 16년(1434년)에는 우의정 최육덕이 아뢰기를 “평도전이 양덕에 몸을 붙이고 있사온데 곤궁이 막심하오니 청하건데 기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니 임금은 반대의견을 내놓은 도승지 안숭선의 말을 옳게 여겨 석방하지 않았다.

이처럼 평도전은 왜인으로 조선에 귀화했고, 정3품의 벼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고향인 대마도정벌에 반대하면서 결국 조선과 왜나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 됐고, 비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다문화 구성원은 고향인 나라와 현재 거주하는 한국 사이에서 갈등을 할 수밖에 없다. 다문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부분이다. 그리고 600여년 전 평도전은 그 갈등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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