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다문화 사회, 그것은 대몽항쟁의 기반이 됐다

▲ 베트남 국기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고려는 다문화집단 사회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에 귀화해서 살았던 외국인이 중국인, 여진인, 거란인, 몽고인, 서역인 등 17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려시대 전쟁을 위해 동원한 병력이 최대 45만명 정도 되고, 보통 병력은 인구의 10% 정도인 점을 감안한다면 450만명 정도의 인구를 보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450만명의 인구 중에서 17만명 정도가 외국인이라면 고려시대는 그야말로 다문화사회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고려시대에 고려를 위해 일한 외국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 중에 베트남 왕자 신분으로 고려에 망명 와서 살다가 몽골군을 크게 물리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이용상’이다.

베트남 안남국 이씨 왕조(1009년~1226년)의 6대 왕 이천조의 동생이자 8대왕 혜종의 숙부가 바로 ‘이용상’이다.

혜종의 외척인 진수도가 권력을 잡아 제멋대로 왕을 바꾸고 진씨 왕조를 세움으로써 이용상은 몸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됐다.

1226년 배를 타고 길을 떠난 이용상은 한반도 옹진반도에 도착했다. 이때 이용상은 도둑떼에게 끌려가는 옹진사람들을 구해줬고, 옹진 현령은 이용상을 정성스럽게 대접했고, 고려 고종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옹진성 동쪽 화산에 살게 해줬다.

세월은 27년이 흘러 1253년(고종 40년) 7월 몽골군 1만대군이 서해안으로 쳐들어왔고, 옹진 현령은 이용상에게 달려와 도움을 청했다. 이용상은 삼면에 토성을 쌓고, 적과 맞서 싸웠다.

이용상은 철저하게 방어를 했고, 몽골군은 다섯달이 넘도록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몽골군 장수는 작전을 바꿔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청했고, 커다란 황금 상자 5개를 예물로 보내왔다.

이용상은 상자를 열어보지 말고 상자에 구멍을 뚫어 그 속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군사들이 상자에 구멍을 뚫고 보니 칼을 품은 자객이 숨어있었다. 이에 이용상은 뜨거운 물을 상자에 부어 자객들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몽골군 장수는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다면서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이용상이 숨겨 놓은 고려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 당했다.

이에 고종은 이용상에게 화산 땅 30리의 식읍 2천호를 상으로 주면서 화산군으로 봉했다. 그 후 이용상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를 화산 이씨의 시조로 모셨는데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됐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90년대 베트남 사람들이 이용상이 한국에 귀화해서 살았던 사실을 알게 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증진을 위해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를 베트남으로 초청했다. 이때 당 서기장을 비롯한 3부 요인이 공항에 나와 맞이할 정도이다.

그리고 지금도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들은 해마다 음력 3월 15일(태조 이공온이 베트남 최초의 왕조인 이씨 왕조를 세운 날) 베트남에 초대받아 간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관계는 단순히 어제 오늘의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상당히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다문화사회였고,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였다. 그리고 그런 역동성이 전세계가 몽골대군에게 무릎을 꿇었을 때 당당하게 맞서 30여년간 대몽항쟁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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