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전쟁 속에 희생된 다문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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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수나라는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한다. 첫 번째 고구려 원정 당시에는 고구려 강이식 장군이 ‘임유관대첩’에서 승리를 하면서 수나라는 패퇴했다.
두 번째 고구려 원정 때에는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에 의해 패배를 하고 수나라 군대는 돌아가야 했다.
곡사정은 수나라 신하이다. 여수전쟁 즉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당시의 인물이다. 곡사춘의 손자로 어릴 때부터 총명해 수나라 양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해서 병조랑이 된다.
병부상서 단문진이 곡사정이 험악하면서 경박함을 알고 중요한 기밀에 관한 중요한 일을 위임해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수양제는 이를 듣지 않았다.
613년 곡사정은 병부시랑이 되면서 세 번째 고구려 원정에 참여한다. 원정 도중 평소에 친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형제들이 도망쳐 자신 밑에 의탁하자 그들을 몰래 보내줬다.
이후 양제가 양현감을 끝까지 책임을 물으려고 하자 마음 속으로 불안해하면서 결국 고구려로 도주, 투항했고, 고구려 측은 그를 가뒀다.
수양제는 양현감의 반란 때문에 세 번째 고구려 원정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양현감 반란을 진압했다.
그 이듬해인 614년에 고구려 원정을 또 다시 감행한다. 내호아가 고구려의 필사성의 군사를 물리치면서 평양으로 진군을 했다.
이 당시 수나라와 고구려 군사 모두 지친 상태였다. 이에 고구려 영양왕은 항복을 요청하면서 가둬놓은 곡사정을 보내겠다고 하자 수나라에서 이를 받아들여 철수했다.
곡사정은 양제에 의해 거열형으로 처형됐다. 양제는 죽은 곡사정의 시신을 금광문 밖에 삶아 백관들에게 이를 먹게 했으며, 남은 뼈는 수거한 후 불태워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만큼 수양제는 곡사정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 곡사정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끝내게 만든 인물이면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정치적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정치적 위기 때문에 수나라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곡사정이지만 고구려는 이런 곡사정을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곡사정은 고구려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다. 즉, 곡사정은 고구려로 넘어온 사람이지만 정치적 희생을 당한 다문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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