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문자를 보존하려고 했던 세종대왕

▲ 사진출처= 픽사베이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세종대왕이 한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위대한 왕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여진 문자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다.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1438년) 7월 6일 무자 3번째기사를 살펴보면 의정부에서 예조의 질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여진(女眞)의 문자(文字)가 장차 폐절될 것을 우려하여, 일찍이 생도 6명을 설치하고 부사정(副司正) 혹은 대장(隊長)의 체아직 한 자리를 주게 하고는 오로지 이를 연습하게 하였사온데, 뒤에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객지에의 우거(寓居)의 곤란을 말하여, 그의 분번(分番)을 들어 주고 1년 만큼 서로 체번하게 하였던 바, 수가 적은 생도가 번을 나누어서 오르내리게 되므로, 혹은 하기도 하고, 혹은 중단하기도 하여 진실로 온당치 않사오니, 청하옵건대, 6명을 증가하여 모두 12명으로 하고, 이에 부사정·사용(司勇)의 체아직 한 자리를 더 주어서 분번(分番)을 없애고 상시 그 학업을 닦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대왕이 여진 문자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서 여진 문자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보이고 있다.

사실 세종대왕 시절 여진인들이 조선으로 많이 귀화했다. 그리고 귀화한 여진인 중에는 궁궐의 수비(시위)를 맡기기도 했다. 귀화한 여진인들로서는 궁궐의 수비를 맡는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기다보니 여진인들이 많이 귀화를 하고 그리고 궁궐 수비 역할을 하는 시위에 많이 참여하게 됐다.

이에 조정에서는 너무 많은 여진인들이 궁궐 수비에 참여하려고 하다보니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요청이 있었고, 세종대왕은 그것을 허락해서 심사를 강화하기도 했다. 그만큼 세종대왕 시절 여진인들에 대한 귀화정책은 상당히 활발했다.

세종대왕은 여진인들의 귀화 정책을 펼치면서 굳이 여진인들의 문자를 폐하고 한문 혹은 훈민정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여진인들이 여진인들 문자를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폐절을 막는 등의 정책을 보인 것이다. 그만큼 귀화한 여진인들도 우리나라 백성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사사로이 신경을 쓴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다문화정책은 귀화한 외국인들에게 그들 나라의 문화를 완전히 버리고 우리나라 문화에 녹아서 살라고만 강요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세종대왕이 굳이 여진인들에게 자신의 문자까지 버리라고 하지 않고 여진인들의 문자를 지키게 노력한 것을 본받아 우리나라의 다문화정책도 자국 위주가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잘 살 수 있는 그런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세종대왕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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