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내려온 과거제도 정비

▲ 고려시대 광종을 다룬 KBS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 홈페이지 캡쳐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쌍기(雙冀)는 고려 광종 때 학자이다. 본래는 후주 사람으로 시대리평사 직을 수행했다. 사신단으로 고려에 왔다가 신병을 얻어 체류, 귀화를 했다.

고려 광종과 쌍기의 만남은 고려사에서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다. 태조 왕건이 통일정책의 일환으로 수많은 호족들과 결혼정책을 펼쳤다.

그러다보니 부인이 많았고, 자식들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호족들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왕권은 약화됐다.

태조 왕건 사후 혜종과 정종을 지나면서 호족들간의 권력다툼이 상당했고, 이로 인해 왕권은 무너졌다.

고려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광종 때 이르러 이런 호족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견제하는 수단으로는 ‘재산’과 ‘새로운 인물의 유입’이다. 광종은 재산을 몰수하는 방법으로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

그 옛날 노비는 ‘재산’이자 강력한 무기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사병(私兵)’을 둘 수 있었다. 노비가 평소에는 경제적 활동을 하면서 특수한 상황에서는 호족들의 사병이 됐다.

때문에 노비를 정비하는 것은 호족들의 권력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노비안검법’은 통일전쟁 당시 노비가 아니었는데도 노비가 된 경우나 빚을 갚지 못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법이다.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과 무력을 모두 붕괴시키는 호족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법이나 마찬가지다.

그 다음으로는 바로 ‘과거제도’이다. 과거제도는 귀화한 쌍기가 건의한 제도인데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유생들이 고려 정부로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권력을 호족들이 잡아왔지만 과거제도를 시행하면서 권력을 호족들과 유생들이 나눠먹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공민왕 시절에는 사대부가 조정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호족들을 무너뜨리고 조선 개국의 문을 열었다.

이 과거제도는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사대부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과거에 급제를 하지 않으면 양반 자격을 박탈했다.

또한 양인신분인 농어민들도 과거제도를 통해 관직으로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이화여대 한영우 석좌교수가 19세기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5백년 간 1만4천여명의 급제자를 분석한 결과, 전체 문과 급제자 10명 중 4명꼴인 5천여명은 중인 혹은 평민 등 낮은 신분 출신이었다.

흔히 과거제도가 양반의 전유물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 통계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민이 벼슬길에 오르는데 큰 장애물이 없었다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과거제도가 고루하고 낡은 제도라고 판단되지만 실상은 평민들의 신분상승 도구가 됐다는 것이다.

아울러 양반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만드는 것도 과거제도이다. 때문에 양반은 자식들의 과거급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부에 열을 올리게 됐고, 그것이 오늘날 사교육이라는 시대적 현상을 낳는 계기가 됐다.

어쨌든 고려 광종 시대의 쌍기가 건의한 과거제도는 지난 1천년을 지탱해온 우리나라의 신분상승 제도 중 하나다.

고려 광종이 다문화인 쌍기를 받아들이면서 고려가 날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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