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명동 지명의 유래는

▲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두차례 조선에 원군와서 공을 세우고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세운 재실로 그의 호인 '그리워할 모(慕)', '명나라 이름 명(明)'자를 써서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구를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재정비 사업을 통해 새롭게 단장됐다. 사진출처= 대구 수성구청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을 왔던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이 끝나자 귀화한 장수이다.

일설에 의하면 장수는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두사충의 호는 묘명이고, 두보의 21대 손이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처남으로 진린과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왔다.

임진년에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또 정유년에는 비장(裨將)이라는 각기 다른 직함을 가지고 두 번이나 전란에 참여했다.

두사충이 했던 일은 진(陳)터와 병영(兵營)터를 고르는 임무였다. 지형지세를 이용해 전쟁을 유리하도록 이끈 일종의 풍수전략가였다.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명나라 조정에 속해 있는 장수가 아니라 장수 밑에 있는 책사 정도였지 않았겠냐라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당시 두사충은 두 아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참전을 한다. 이때 부인에게도 조선으로 가기를 권했지만 부인은 조선에 가기 싫다고 해서 부인을 명나라에 두고 조선으로 왔다. 그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진린 도독이 귀국하려고 했지만 두사충은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 발언으로 볼 때 아마도 두사충은 진린 도독 휘하에 있는 책사 정도로 명나라에 직접적인 명령을 받는 장수는 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두사충은 조선에 남기로 했고, 명나라는 얼마 가지 않아 멸망을 했다. 아직까지 두사충이 조선으로 귀화를 왜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명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측하고 조선으로 귀화한 것 아니냐는 추정을 할 수 있다.

두사충은 현재 경상감영 자리에 터를 잡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조정은 두사충의 거처를 수용하는 대신 계산동 일대 4천여평의 땅과 대토를 한다.

두사충은 계산동에서 살다가 현재 대덕산으로 옮기면서 고국인 명나라를 그리워하며 현재 대구고 근처에 대명단을 세우고 천자를 향해 정기적으로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대명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두사충은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 미리 봐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담티고개 전설의 기원이 된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됐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두사충은 생전에 여러 최고인물들과도 교류를 했다.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우복 정경세 등과 교우를 했다. 또한 이순신 장군 묘자리로 잡아준 사람이 두사충이다. 아울러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의 창평이씨의 무덤 자리를 봐줬다. 이처럼 두사충은 명나라에서 귀화한 후 조선의 영웅호걸과 교류를 하면서도 명나라를 그리워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지명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특히 현재 대구 지역 지명 상당수가 두사충에 의해 탄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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