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 장수, 조선에 뿌리를 내리다

▲ KBS 드라마 징비록의 한 장면 캡쳐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김충선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사극이 인기를 얻으면서 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김충선이 항왜(항복한 일본사람) 장수라는 것은 이제는 사극을 본 사람들은 얼추 알고 있을 것이다.

김충선은 沙也可(사야카)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천명을 인솔하고 참전을 했다.

그런데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한 후 귀부해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귀부 당시 사야카는 박진에게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리에서 선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는 항복문서를 전했다.

이후 사야카는 경상도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별였다. 임진왜란 당시 모두 78회 전투를 치러서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이르기도 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 전투에서 공을 세워 무관 3품 당상에 올랐다.

이어 사야카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 휘하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 종2품 가선대부를 하사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야인의 침입이 잦으면서 변방 방어를 자청, 임무를 수행하고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정헌대부에 올랐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이괄의 부장 서아지를 포참한 공으로 사패지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에 반납해 둔전을 만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소명을 받지 않고 광주 쌍령에 나가 싸워 청나라 병사 500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됐다는 말에 대성통곡하면서 대구의 녹리로 돌아갔다.

사후 녹동서원(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배향됐다. 1798년(정조13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녹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14년 재건됐다.

김충선이 귀화한 이후 전투에서 이처럼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김충선을 단순히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로만 보면 안된다. 왜냐하면 김충선이 귀화한 직후 조총 개발을 건의하는 서신을 절도사에게 제출했고, 이순신과 나눈 서신에서는 “이미 조총을 개발해 훈련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김충선이 조선으로 귀화한 후 조선에 일본식 조총 및 화약 제조법과 철포대 전술을 전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때문에 김충선은 단순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가 아니라 조총 기술도 전수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김충선은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 5남 1녀를 뒀다. 현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그의 후손들인 사성 김씨 집성촌이다.

사성 김씨 족보에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 성을 하사받은 김충선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 후손으로는 박정희 정부 의 법무부,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김치열, 대학교수 김윤희, 전 AOS 부회장 김형국이 있다.

이처럼 김충선은 귀화한 이후 자손이 번창해서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도 중요한 일꾼이 되고 있다.

다문화가정을 단순히 귀화한 외국인 쯤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든든한 재목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그런 사회가 돼야 한다.

그들의 자녀들이 번창해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버팀목이 될 수 있게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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