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복식 폐지 왜 했나

▲ 사진출처= 픽사베이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슬람인과 관련된 기사(記事)가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이슬람 사람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태종과 세종 시대 때 이슬람 사람들과 관련된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

태종 7년(1407)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都老)가 처자(妻子)를 데리고 함께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서 살게 했다고 기록돼있다. 사문이 일반적으로 성직자 계층을 가리키는 용어다.

태종 12년(1412) 회회 사문(回回沙門) 도로(都老)에게 명해 금강산(金剛山)·순흥(順興)·김해(金海) 등지에서 수정(水精)을 캐도록 했다. 이는 회회 사문 도로가 조선 땅의 산천이 많아서 반드시 진귀환 보화를 가졌을 것이니 두루 돌아다니게 한다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후 경상도 도관찰사 안등이 회회 사문 도로가 캔 수정 3백근을 바쳤다고 기록돼있다.

그해 회회 사문(回回沙門) 다라(多羅)에게 쌀 10석을 내려 줬다. 그 이유는 임금이 양옥(良玉)을 내어 다라에게 주며 각서(刻署) 해 바치도록 했다. 각서는 도장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즉, 옥을 내어서 회회 사문 다라에게 도장을 만들게 한 것이다.

이후에도 태종과 세종 때에 회회 사문들에게 쌀을 하사하는 등의 기록이 나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색이 있는 것은 세종 9년(1427)의 기록이다. 예조에서 이슬람 복식을 폐지할 것을 세종에게 청한 것이다.

예조는 “회회교도는 의관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 때 회회도의 기도하는 의식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때(세종 때)까지 이슬람 사람들은 이슬람 복식을 그대로 고수했고, 대조회(모든 벼슬아치들이 다 모여 임금을 알현하는 것) 때에도 이슬람 복식과 기도하는 의식을 그대로 고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슬람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그대로 고수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슬람 사람들과 결혼하기를 꺼리게 됐다. 이에 세종 때에 이슬람 복식과 의식 등을 폐하면서 이슬람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동화해서 살게 만든 것이다.

다른 문화를 배척해서 그 문화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과 동화돼서 하나로 잘살게 하기 위해 이슬람 복식과 의식을 폐지한 세종대왕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종대왕은 조선의 문화와 이슬람의 문화가 하나로 융합되게 만드는 다문화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임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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