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 출신으로 조선을 창업하다

▲ 이지란 초상화(용인 경기도박물관 소장)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이지란(李之蘭, 1331년 ~ 1402년)은 최근 드라마를 통해 유명세를 탔다. KBS ‘용의 눈물’, KBS ‘정도전’, SBS ‘육룡이 나르샤’ 등을 통해 유명해진 역사적 인물이다.

그리고 이지란이 여진족 출신이라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여진족 이름은 퉁두란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여진 출신으로 원, 몽고제국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千戶)가 됐다고 적고 있다.

아라부카가 일찍 서쪽을 정벌할 때 큰 별이 우물 지붕 위에 드리웠는데, 천기 관장하는 사람이 “계명성(샛별)이라 그 아래에서 반드시 위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지란이 태어난 것이다.

공민왕 20년에 1백호를 거느리고 고려 조정에 내투했고, 청해(지금의 북청)에 있다가 이성계 휘하로 들어갔다.

우왕 6년 이성계와 함께 적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왜굴르 대패하는 공을 세웠다. 이른바 황산대첩이다.

이와 더불어 이성계를 따라서 각종 전장을 누볐다. 위화도 회군 이후 상의동지밀직사사(商議同知密直司事) 회의도감사(會議都監事)가 됐고, 창왕(昌王) 때에는 지밀직사사를 맡았다.

이후 공양왕 4년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가 되었고 이어 명나라로부터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가 그 해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자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使)가 됐다.

이듬해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가 되어 왜구를 막는 데 힘썼으며, 태조 8년(1398년)에는 명의 건주위 정벌에 공을 세워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제수됐고 이어 판형조사 의흥삼군부사 중군절제사에 보직 변경 임명됐다.

이후 태종이 즉위하면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불문에 귀의했다고 전해졌다.

이지란은 태종 이방원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겠다고 하자 이지란은 가담하지 않겠다고 밝혓다.

하지만 이방원이 정도전 및 이복동생을 제거하겠다고 하자 이지란은 이방원에 가담, 정사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성계가 이지란보다 네 살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고, 형으로 모셨다. 이성계와 이지란의 관계는 그만큼 두터웠다. 만약 이지란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조선 창업을 할 생각은 못했을 정도로 이지란과 많은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또한 여진족 출신으로 여진인과 조선인이 하나가 되기 위해 각종 노력을 했다. 조선인과 여진인의 결혼을 허락하도록 했으며 세금 문제도 조선인과 여진인이 차별을 두지 않도록 배려했다.

일찍이 후손들에게 ‘충청효근(忠淸孝謹)’을 가훈으로 물려줬다. ‘충성, 깨끗함, 효 도, 삼감’을 나타내는 이 네가지 교훈, 즉 정의와 충성의 리더십을 후손들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그는 여진인으로 조선에 귀화해 많은 후손들과 청해 이씨 가문을 남겼다. 청해 이씨는 3713가구에 1만 2천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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