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들을 백정이라 불렀나

▲ ebs 역사채널 e-백정 편의 한 장면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우리는 흔히 백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도축업을 하는 조선시대 천민을 떠오른다. 일정한 주거 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가축을 죽여서 그 고기를 판매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백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백정(白丁)이란 단어는 ‘일반평민’을 뜻한다. 고려시대에서는 ‘평민’의 뜻으로 백정을 사용했다.

고려시대 때 도축업자를 주로 ‘화척’ 혹은 ‘양수척’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백정’이라고 부른 것이다.

화척 혹은 양수척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실상 ‘북방 유목민족’들이다. 백정이 북방 유목민족이라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조선말기 백정의 모습을 묘사한 글을 살펴보면 백정의 겉모습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겉모습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899년 조선에 상륙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W.F.샌즈’가 인천 제물포항에서 처음 본 조선인이 바로 백정이다.

W.F.샌즈가 ‘극동회상사기(1930년 발행)’에서 묘사한 백정의 모습은 인상착의가 동양인과는 사뭇 달랐는데 눈동자가 회색이나 푸른색 혹은 갈색이었고, 머리칼은 붉고 안색이 좋았으며 키가 180cm를 넘었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얇은 파란 눈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W.F.샌즈는 백정을 혼혈 혈통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고려시대 백정의 또 다른 이름은 ‘달단(韃靼)’이다. 달단은 타타르족을 일컫는 말로 중국 한족의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총칭으로 명나라에서는 동몽고인을 가리켰고, 지금의 네이멍구와 몽골 인민공화국 동부에 거주해있다.

고려시대 거란과의 전쟁 과정에서 북방 유목민들이 대거 고려 땅으로 넘어오게 됐다. 이들은 고려땅에 정착하면서 ‘화척’ 혹은 ‘양수척’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북방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키가 상당히 컸고, 골격도 상당히 컸으며, 이목구비도 또렷했다.

우리가 흔히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람들을 보고 ‘백정’같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체격이 상당히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들은 북방 유목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가축을 다루는 솜씨가 남달랐고, 그러다보니 고려에서 도살업을 주로 하게 됐다. 때문에 ‘백정=도축업자’로 이미지가 각인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녔고, 도살업을 주로 했으며 자신들끼리의 집단생활을 좋아했다. 이 모든 것이 북방 유목민족의 습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때 넘어온 북방 유목민족들이 조선말까지 백정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생활을 하지 않고 그들만의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조선 세종 때인 1423년(세종 5)에는 천민이란 인식을 없애기 위해 그동안 ‘화척’ 혹은 ‘양수척’으로 불렀던 사람들을 ‘백정’(일반 평민)으로 부르게 됐다. 그리고 우리땅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으며 살라고 각종 혜택을 줬다.

하지만 백정은 본래 북방 유목민족이라서 자기들끼리 집단생활과 유랑생활을 하면서 도축업을 도맡게 된다.

또한 일반사람들은 이들을 ‘신백정’이라고 부르게 됐고, 화척은 화백정, 재인은 재백정이라 따로 부르게 됐다. 이로 인해 백정은 천시되고 멸시를 받게 됐다.

그럼에도 백정은 우리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356년(공민왕) 때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찾아내서 주로 서북방 경계를 담당하는 군사로 충당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유목민적 기질과 농경에 정착하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산악지대에서 오랑캐를 상대할 수 있는 군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말 왜구 격퇴와 1419년(세종1) 대마도 정벌, 1467년(세조 13) 이시애 난을 진압할 때 백정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또한 세종대 이후 갑사 혹은 별패 혹은 시위패 등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세도정치 시절에는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정의 문란)으로 인해 평민들의 부담이 허리를 휠 정도가 되자 일부 평민들은 백정으로 자진해서 편입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기존 백정과는 다른 모습의 백정이 나타나게 된다. W.F.샌즈가 백정을 ‘혼혈혈통’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계속해서 백정들과 일반평민들이 섞이게 되면서 기존 백정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면서 현대에서는 백정과 일반 국민을 구분할 수 없게 됐다.

한편,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신분해방을 했지만 일반민 사이에서 백정에 대한 인식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일제강점기 때에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이 되면서 백정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는 ‘백정’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

하지만 불과 백오십년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파란 눈’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백정’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로 들어온 북방 유목민족을 우리는 ‘백정’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는 백정들을 우리 국민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해왔었다.

하지만 쉽게 섞이지 못한 그들의 습성 때문에 몇백년을 이어왔었다가 결국 구한말이 돼서야 섞이면서 오늘날에는 기존 백정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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