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어기선 기자]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고조선의 왕조 국가 중 하나다. ‘조선’은 셋으로 구분하는데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뉜다.

사실 기자조선은 역사학계에서 실재 여부, 건국 과정, 성격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고 인식하고 있다.

역사공부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그냥 ‘고조선’하면 ‘단군조선’만 떠오르기 마련인데 ‘고조선’에는 ‘단군조선’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기자조선’ ‘위만조선’처럼 세분화됐다.

현재 사학계는 기자조선에 대한 고전적인 인식 즉 기자동래설,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승계 등을 부정하고 있다.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 문헌에서 나타난다. 기자조선이 나타난 최초의 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全)’과 ‘사기’이다.

상서대전에는 기자는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했다. 주나라 무왕은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적혀 있다. 아울러 ‘사기’에는 기자가 조선의 군주가 됐다고 기록했다.

이 두 기록 때문에 기자가 스스로 나라를 세웠는지 아니면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조선을 세웠는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위략(魏略)’, ‘한서’, ‘삼국지’ 등에서 기자동래설을 계속 기록하는 한편 기자 이후의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도 기자와 연관시켜 부왕과 준왕은 기자의 40여 세손 기부(箕否), 기준(箕準)으로 기록됐다.

어쨌든 중국의 문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기자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했고, 신라의 최치원은 기자동래설을 긍정했다.

고려시대에는 유교 통치가 이념으로 굳혀지면서 평양에 기자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단군과 기자를 나란히 국조로 숭상됐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해 ‘기자’에 대한 숭상이 이뤄졌다.

어쨌든 각종 문헌 등을 살펴보면 ‘기자’는 중국에서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됐다는 점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후 기원전 194년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 당했고, 이로써 기자조선은 멸망했다.

다만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해 기자조선을 건국했다는 이야기는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이유는 유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102년(고려 숙종 7년)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기자묘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기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청동기와 한반도의 청동기 양식이 전혀 다르며 성분 또한 크게 다르다. 기자가 상나라의 왕족으로 조선의 왕이 됐다면 중국의 유물이 발견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나라 이전의 옛날 기록들은 기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거나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없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기록은 조선의 왕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는 중국 측에서 한반도를 사실상 중국이 지배했다는 논리를 펼치기 위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어쨌든 ‘기자’는 중국에서 넘어온 인물이고, 한반도에 정착한 인물이다. 중국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한반도로 넘어와서 한반도의 역사를 좌지우지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바로 ‘기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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