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가정 출신으로 조선 과학 발전 이루다

▲ 사진출처= KBS 제1TV 역사드라마 장영실 포스터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장영실은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蘇州, 쑤저우)·항주(杭州, 항저우) 사람이다.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다.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세손으로 고려말 전서(典書)였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관노로 전락했다.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장영실 출생은 1385~1390년 경이다. 장영실은 동래현 관청에서 일하는 노비가 됐으며, 발명가인 장영실의 훌륭한 재주를 태종이 인정, 발탁했다.

세종대왕은 장영실의 재주를 눈여겨보면서 윤사웅(尹士雄), 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의 나이 34세 때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됐다.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상의원 별좌에 임명됐다.

그 후 세종대왕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 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었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 소간의를 비롯해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 혜정교와 종묘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 규표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호군의 관직을 더했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했다. 갑인자는 약 20여만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하다가 나이 약 53세였던 1442년 3월(세종24년),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기술자로서 정3품 상호군 장영실이 책임을 지고 있던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100대와 파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 장영실은 역사에서 자취가 사라졌다.

장영실에 대한 평가는 조선의 과학자로 조선의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다문화가정 출신으로 그것도 천민의 출신으로 승진을 거듭해서 정3품관 상호군에 이르는 관직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전기의 사회적 문화적 기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전기 다문화가정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었고, 천민에 대해서도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 사회가 유교를 중시하면서도 실용주의에 상당한 눈을 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념에 묶이지 않고, 편견에 묶이지 않고 사회의 발전을 위해 모든 사고를 열려있는 그런 조선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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