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

▲ 사진출처= 픽사베이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이란 이름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상당히 낯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유박해, 병인박해와 더불어 기유박해를 아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 박해의 한 가운데 있던 신부가 바로 피에르 모방 신부이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로 여겨진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다.

모방 신부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바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1829년 5월 13일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됐으며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돼 마카오로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천주교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조선의 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해,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에의 입국을 기도했으나 국경의 감시가 심해 만주에 머물렀다.

이후 브뤼기에르 주교가 뇌일혈로 선종하자 모방 신부는 혼자 삿갓에 상복차림을 하고 1836년 1월 12일 조신철, 정하상 등의 인도로 압록강을 건너 입국했고, 15일 후에 한양에 도착했다. 모방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일원으로서 최초로 조선 땅을 밟은 사람이다.

조선어를 공부하며 먼저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촌을 방문, 200여명에게 영세를 줬다. 모방 신부는 상복차림을 하고 다녔다. 한자나 통역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었다.

이어 입국한 샤스탕 신부는 누추한 움막에 살며 산나물에 잡곡밥을 먹는 등 낯선 조선땅의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러던 중 중병에 걸려 샤스탕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았고, 삼개월 후 기적적으로 완치됐다.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조선의 천주교 신도 숫자를 6천명으로 추산했다. 이들은 1837년 한해 동안 1237명에게 세례를 줬고, 2087명의 고해성사를 들었으며 1950명에게 영성체를 분배했다. 이에 조선 천주교 신자 숫자가 6천명에서 9천명으로 증가했다.

1836년 말 세 명의 청소년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김대건 안드레아 그리고 최양업 토마스를 정하상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그는 그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그들을 마카오로 보냈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신학생들에게 라틴말의 기초를 가르쳤다 젊은 신학생들은 8개월에 걸쳐 만주와 몽골 그리고 청나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들은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처럼 외국인 천주교 사제의 소문이 퍼지면서 관리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됐다. 조선 조정은 외국인 선교사를 찾기 위해 수많은 천주교 교인들을 고문했다. 앵베르 주교는 자수하는 것이 교우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이에 1839년 9월 6일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엥베르 주교의 권면에 따라 홍주 근처에서 대기 중인 포졸들에게 자수를 했다. 9월 21일(음력 8월 14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앵베르 주교·샤스탕 신부와 함께 참수된 후 군문효수됐다. 두 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와 함께 순교하던 그 때 모방 신부의 나이는 35세였다.

그 세 명의 유해는 서울특별시의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위치한 삼성산에 묻혔다가 후일에 명동 대성당의 지하의 그로토로 이장됐으며 일부 유해는 절두산순교성지와 최초의 매장지였던 삼성산 성지에도 세분의 성인을 모시고 1989년 축성식을 갖고 성지 본당인 삼성산 성당에 의해 성지가 관리되고 있다.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와 모방 베드로 신부 그리고 샤스탕 야고보 신부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모방 신부가 과연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신부인지에 대한 반론이 있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당시 서양인 천주교회 신부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군 군종사제로 조선에 입국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은 당시 ‘서세동점’을 과제로 내걸고 있었다. 서세동점이란 서양의 동방 세력 진출을 막는 것을 주용한 과제로 내걸었다.

다라서 서양종교인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살육이 무자비했다. 당시 헌종은 사학을 배척한다는 뜻에서 척사윤음을 내렸고, 한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나머지 네 집도 처벌하는 이른바 오가작통법도 강화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해왔다.

하지만 서양문물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불과 몇 십년 지난 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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