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넘어 정치적 동반자로

▲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영정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만약 노국대장공주가 순산을 하고 백년해로 했다면 고려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노국대장공주 패아지근씨(魯國大長公主 孛兒只斤氏, ? ~ 1365년 3월 8일(음력 2월 16일))는 고려 공민왕의 왕비이다.

고려가 원나라의 복속에 들어가면서 고려왕은 원나라에서 책봉을 했다. 그러면서 원나라 황제의 딸이 고려왕의 아내 즉 왕비가 됐다. 고려왕들은 어릴 때 원나라에서 생활을 하다가 성년이 되면 원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을 한 후 고려로 와서 왕이 됐다.

고려왕들은 사실상 고려에는 정치적 기반이 없는 것이 당연지사. 이런 이유로 실세는 고려왕이 아니라 원나라 황제의 딸 즉 왕비가 실권을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은 싫든 좋든 원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결혼을 했다. 그리고 고려왕으로 책봉이 됐다. 고려의 실세는 ‘왕비’였고, 왕은 주로 ‘왕비’의 신하에 불과했다. 즉, 고려의 운명은 ‘왕비’가 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원나라에서 생활했던 공민왕도 고려로 귀국했을 때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원자주정책을 펼쳤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은 노국대장공주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공민왕하면 ‘반원자주정책’이 떠오른다. 우선 원에 대한 ‘충성충(忠)’을 떼고 원래 왕조 이름으로 복구했다. 내정간섭기구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만주 땅으로 쫓아내어 철령 이북 땅을 회복했다.

몽골풍습인 몽골풍을 몰아내고 기철 등 친원세력을 제거했다. 아울러 과거제를 부활해서 신진사대부를 대거 등용했다.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공민왕이 개혁정치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노국대장공주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의 간섭기에는 왕비와 왕 중에 신하들은 과연 누구의 말을 전폭적으로 지지를 했을까라는 것을 추론해볼 때 아마도 왕비의 말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즉,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에 전폭적 지원을 했기 때문에 신하들도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에 동조를 했을 것이라고 추론된다.

문제는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인해 사망을 하면서 공민왕은 정치적 후원자가 사실상 사라졌다. 즉, 공민왕이 반원자주정책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노국대장공주 사망 이후 초기에는 ‘신돈’을 기용해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수탈한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또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본래 신분으로 해방시켜주는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노국대장공주가 사라진 공민왕은 사실상 빈껍데기라고 할 수 있다. 권문세족은 ‘신돈’을 몰아내기로 작정을 했고, 성리학을 숭상하는 ‘신진사대부’ 역시 스님인 ‘신돈’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에 반대를 했다.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협공에 결국 공민왕은 무릎을 꿇으면서 신돈을 내치게 됐다.

만약 노국대장공주가 살아있었다면 공민왕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을 것이고,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계속 이어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노국대장공주가 사라진 공민왕은 빈껍데기가 되면서 결국 기이한 행적을 보이게 될 수밖에 없다. 권문세족의 횡포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이한 행적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친히 아내의 초상화를 그려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며 울었다. 또한 그녀의 영을 위로해 주기 위해 천도제를 지내고 영전을 짓기 까지 했다. 이는 노국대장공주를 그리워하는 것도 있지만 정치적 후원자를 잃어버린 슬픔도 포함됐을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권문세족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공민왕은 기이한 행동을 더욱 보이게 된다. 미소년 남자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자제위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동성애와 관음증에 빠져 있었고, 후사를 얻기 위해 미소년들로 하여금 비빈을 욕보이게 했다는 일설도 있다.

물론 이는 조선왕조가 개창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했다는 평가도 있다. 자제위는 왕권을 강화하고 신변 호위 및 인재 양성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자제위 소속 홍륜 등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하기는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만약 노국대장공주가 순산을 하고 건강하게 백년해로를 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는 달라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으로도 보여진다.

몽골 여인으로 원나라 황제의 딸로 고려에 왔지만 고려를 사랑하고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의 정치적 후원자가 된 노국대장공주의 짦은 생애가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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