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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는 한국이름이 목인덕(穆麟德)이다. 독일 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사람이다.1882년(고종 19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이 언어에 능통하고 국제적인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요청했을 때 청나라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의 통리아문 협판이 돼 외교와 세관 업무를 담당했다.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파견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일본 영향력을 줄이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청나라는 1882년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에 개입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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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선 기자
2016.08.3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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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지난 회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순교자인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 신부에 대해 설명을 했다면 이번 회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개신교 순교자인 로버트 토머스 목사를 설명하고자 한다.로버트 토머스 목사는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863년 런던대학 뉴칼리지를 졸업한 후 하노버 교회에서 24세의 나이로 목사 안수를 받고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상해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내가 곧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토마스 목사는 이에 충격을 받고 선교사의 꿈을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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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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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이란 이름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상당히 낯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유박해, 병인박해와 더불어 기유박해를 아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 박해의 한 가운데 있던 신부가 바로 피에르 모방 신부이다.피에르 모방 신부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로 여겨진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로 인해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 한 사람이다.모방 신부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바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1829년 5월 13일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가 됐으며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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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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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헨드릭 하멜은 이른바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원이자 서기였다. 고향은 네덜란드 호린험이고 1653년에서 1666년까지 조선에 억류당했다.이 시기는 효종 4년에서 현종 7년으로 총 13년 28일 동안 조선에 머물렀다.하멜은 서기였다. 즉 선원 중에 유일하게 문자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때문에 하멜이 조선에 표류했을 때 조선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1653년 스페르베르('De Sperwer'/'the Sparrowhawk', 네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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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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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박연은 조선에 최초로 정착한 서양인이다.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e)이다.박연의 고향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부지방에 있는 드 레이프 지방에서 태어났다. 1626년 뱃사공으로 홀란디아(Holandia)호에 승무하다가 일본에 가려고 1627년에 아우버르케르크(Ouwerkerck)호로 바꿔 타고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동료 헤이스베르츠(Direk Gijsbertz) 및 페르베스트(Jan pierteree Verbaest)와 함께 땔감과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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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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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년) 5월 26일 경술 1번째기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1598년은 정유재란 당시이다. 선조가 팽유격(彭遊擊)(여기서 유격은 지위를 말하고 본명은 팽신고) 처소에서 술자리를 가졌다.선조가 팽유격에게 한양에 있을 것인지 남하할 것인지를 물었는데 팽유격이 말하기를 1개월 후에 남하하고자 한다고 대답했다.그리고 팽유격이 말하기를 데리고 온 얼굴 모습이 다른 신병을 소개한다고 했다. 그래서 선조가 어느 지방 사람이며 무슨 무술을 가졌는지 묻자 팽유격이 다음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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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6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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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을 왔던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이 끝나자 귀화한 장수이다.일설에 의하면 장수는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두사충의 호는 묘명이고, 두보의 21대 손이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처남으로 진린과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왔다.임진년에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또 정유년에는 비장(裨將)이라는 각기 다른 직함을 가지고 두 번이나 전란에 참여했다.두사충이 했던 일은 진(陳)터와 병영(兵營)터를 고르는 임무였다. 지형지세를 이용해 전쟁을 유리하도록 이끈 일종의 풍수전략가였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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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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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김충선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사극이 인기를 얻으면서 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김충선이 항왜(항복한 일본사람) 장수라는 것은 이제는 사극을 본 사람들은 얼추 알고 있을 것이다.김충선은 沙也可(사야카)로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천명을 인솔하고 참전을 했다.그런데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항복한 후 귀부해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귀부 당시 사야카는 박진에게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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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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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세종대왕은 세종 8년(1426) 삼포개항을 단행했다.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의 요청에 따라 기존에 개방했던 웅천(진해)의 내이포, 부산포 이외에 울산의 염포를 추가로 개방해 일본인에게 교역을 허락한 일이 있다. 이른바 유화책으로 삼포개항을 한 것이다.계해조약에 따르면 포구마다 왜관을 설치, 왜인에 대한 무역을 관할하고 또 그들의 접대장소로 삼았다.하지만 3포에는 왜인이 왕래할 수 있어도 상주할 수 없었고, 왜인은 무역·어로가 끝나면 귀국을 해야 했다.하지만 이 법규를 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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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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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세종대왕이 한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위대한 왕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여진 문자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다.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1438년) 7월 6일 무자 3번째기사를 살펴보면 의정부에서 예조의 질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여진(女眞)의 문자(文字)가 장차 폐절될 것을 우려하여, 일찍이 생도 6명을 설치하고 부사정(副司正) 혹은 대장(隊長)의 체아직 한 자리를 주게 하고는 오로지 이를 연습하게 하였사온데, 뒤에 먼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객지에의 우거(寓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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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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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태국 사람이 조선시대 사신으로 건너와서 관직에 오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있다.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6월 16일 경인 1번째 기사를 살펴보면 섬라곡국(暹羅斛國)서 그 신하 내(乃 : 내(乃)는 그 나라 관직 이름이다) 장사도(張思道) 등 20인을 보내어 소목(蘇木) 1천 근, 속향(束香) 1천 근과 토인(土人) 2명을 바치니, 임금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대궐 문을 지키게 했다고 기록돼있다.또한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7일 갑술 2번째 기사를 살펴보면 섬라곡 사람 장사도(張思道)를 예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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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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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슬람인과 관련된 기사(記事)가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이슬람 사람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태종과 세종 시대 때 이슬람 사람들과 관련된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태종 7년(1407)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都老)가 처자(妻子)를 데리고 함께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서 살게 했다고 기록돼있다. 사문이 일반적으로 성직자 계층을 가리키는 용어다.태종 12년(1412) 회회 사문(回回沙門) 도로(都老)에게 명해 금강산(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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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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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장영실은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소주(蘇州, 쑤저우)·항주(杭州, 항저우) 사람이다.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다.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세손으로 고려말 전서(典書)였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관노로 전락했다.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장영실 출생은 1385~1390년 경이다. 장영실은 동래현 관청에서 일하는 노비가 됐으며, 발명가인 장영실의 훌륭한 재주를 태종이 인정, 발탁했다.세종대왕은 장영실의 재주를 눈여겨보면서 윤사웅(尹士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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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선 기자
2016.05.3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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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설장수라고 하면 무슨 ‘장군’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설장수(偰長壽)’는 여말선초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외교관이다.설장수는 귀화한 위구르인이다. 위구르는 중국 서북쪽 지방으로 유목민족이었다. 동양인의 생김새보다는 서양인의 생김새에 더 가깝다. 10대 후반에 아버지인 백료손(伯遼遜·설손)이 고려에 귀화하면서 이 땅과 인연을 맺게 된다.공민왕은 왕자 시절 원나라 수도에서 황태자에 대한 시종을 맡고 있었는데 황태자 교육기관에서 백료손과 어울려 지냈다고 알려졌다.고려 말기 홍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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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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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이지란(李之蘭, 1331년 ~ 1402년)은 최근 드라마를 통해 유명세를 탔다. KBS ‘용의 눈물’, KBS ‘정도전’, SBS ‘육룡이 나르샤’ 등을 통해 유명해진 역사적 인물이다.그리고 이지란이 여진족 출신이라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여진족 이름은 퉁두란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여진 출신으로 원, 몽고제국의 금패천호인 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로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千戶)가 됐다고 적고 있다.아라부카가 일찍 서쪽을 정벌할 때 큰 별이 우물 지붕 위에 드리웠는데, 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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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선 기자
2016.05.1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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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만약 노국대장공주가 순산을 하고 백년해로 했다면 고려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노국대장공주 패아지근씨(魯國大長公主 孛兒只斤氏, ? ~ 1365년 3월 8일(음력 2월 16일))는 고려 공민왕의 왕비이다.고려가 원나라의 복속에 들어가면서 고려왕은 원나라에서 책봉을 했다. 그러면서 원나라 황제의 딸이 고려왕의 아내 즉 왕비가 됐다. 고려왕들은 어릴 때 원나라에서 생활을 하다가 성년이 되면 원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을 한 후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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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0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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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이제는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 중 하나가 ‘만두’이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만두’는 특별한 날, 즉 명절이나 제사 등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두는 이제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음식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만두가 우리나라에 유래한 시기는 언제였을까.음식전문가들은 대개 삼국시대를 꼽고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고려시대로 돼있다.고려사를 살펴보면 고려 명종 때 거란에서 귀화한 위초(尉貂)라는 인물이 있다. 위초의 부친이 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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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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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우리는 흔히 백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도축업을 하는 조선시대 천민을 떠오른다. 일정한 주거 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가축을 죽여서 그 고기를 판매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백정이라고 부른다.하지만 백정(白丁)이란 단어는 ‘일반평민’을 뜻한다. 고려시대에서는 ‘평민’의 뜻으로 백정을 사용했다.고려시대 때 도축업자를 주로 ‘화척’ 혹은 ‘양수척’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백정’이라고 부른 것이다.화척 혹은 양수척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실상 ‘북방 유목민족’들이다. 백정이 북방 유목민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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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선 기자
2016.04.2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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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고려는 다문화집단 사회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에 귀화해서 살았던 외국인이 중국인, 여진인, 거란인, 몽고인, 서역인 등 17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고려시대 전쟁을 위해 동원한 병력이 최대 45만명 정도 되고, 보통 병력은 인구의 10% 정도인 점을 감안한다면 450만명 정도의 인구를 보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450만명의 인구 중에서 17만명 정도가 외국인이라면 고려시대는 그야말로 다문화사회라고 할 수 있다.때문에 고려시대에 고려를 위해 일한 외국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 중에 베트남 왕자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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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선 기자
2016.04.19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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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워치=어기선 기자] 고려가 농경국가라고 생각한다면 거대한 착각이다. 고려는 농경국가가 아니라 국제무역국가이다. 그 당시 전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국제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국가가 바로 ‘고려’다.코리아(korea)라는 말이 서방세계에 퍼진 것도 이때라고 할 수 있으니 고려가 얼마나 거대한 국제무역국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태조 왕건의 기반은 바로 송악(개성)이다. 태조 왕건의 선조들은 송악의 무역항 벽란도를 기반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무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삼국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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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기선 기자
2016.04.12 0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