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하는 그 날까지

 

[뉴스워치=특별취재팀] 왕천영은 부모 모두 중국 장춘이 고향이다. 대학 재학 중 만나 결혼했고, 왕천영도 중국 장춘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은 6개월만 한국에서 지내보자고 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오게 됐다. 그런데 어머니 공부가 길어지게 됐고, 아예 청심국제학교 교사로 취업을 하게 됐다. 기자인 아버지 역시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서 한국에서 살게 됐다.

한국말을 하나도 모르는 왕천영은 일반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을 하게 됐다. 어머니가 혼자서 어떻게든 헤쳐 나가라는 뜻으로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4학년에 올라가면서 담임선생님이 열정적으로 한국어를 알려줬고, 관심을 쏟아준 덕분에 조금씩 나아지게 됐다.

하지만 아이들은 왕천영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마음이 잘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5학년 때 어미니 직장 때문에 남양주로 이사를 하게 됐고, 완전히 새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친구들과도 편하게 사귀게 됐다.

공부보다는 적응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부모는 공부에 대한 압박을 별로 안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

그런데 1학년 마지막 기말고사에서 수학점수가 50점이 나오면서 충격을 받게 됐고, 부모에게 얘기를 해서 과외를 받게 됐다.

과외교사는 50대 남자였는데 과외교사 이외에도 훌륭한 인생의 멘토 역할을 했다. 틈틈이 인생 얘기를 해주고, 여행이며 영화며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덕분에 성적도 쑥쑥 올라서 고등학교도 남양주에서 제일 좋은 곳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쯤에는 한국은 더 이상 이방인의 나라가 아니게 됐다. 생각도 한국어로, 꿈도 한국어로 꾸는 완벽한 한국인이 됐다.

당시 영화인이 되겠다는 소망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고등학교를 예고로 가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말렸다.

어머니는 아직은 생각이 미숙하니까 진로를 확정하기보다는 좀 더 공부를 해보고 결정하라고 해서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부터 한 학기 동안은 미국에 가서 공부도 해봤다. 하지만 공부는 한국에서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유학의 꿈도 바로 접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자주 집에 놀러왔고, 교육심리를 전공한 어머니가 친구들의 고민을 다 들어주고 자상하게 상담을 잘해줬다. 이에 교우관계가 더 좋아졌다.

대입을 준비할 때는 외국인전형이 생각보다 까다로웠지만, 중국어, 영어, 한국어시험에 한국사 시험까지 잘 치러서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 무난히 진학을 했다.

전공을 결정할 때도 영화연출 쪽을 가고 싶었지만, 학사과정까지는 한국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학문을 하라는 어머니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대신 대학졸업 후 대학원에서 제대로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한국역사를 공부한다고 하니 중국인으로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도 했다. 하지만 왕천영은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중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으로서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천영은 우연히 태어난 곳이 중국 장춘일 뿐 현재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비록 한국 국적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며 한국의 모든 것을 아끼고 누리면서 살고 있는 한국사람이다.

왕천영은 대학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영화연출을 공부해서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부터 시나리오 쓰는 법이나 영화 쪽 책들을 많이 읽으며 오랫동안 꿈을 키워왔다. 선생님이 인생 그래프를 그려보라고 하면 ‘난 20대에 영화감독이 돼서 40대에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겠다!’ 이렇게 써놓곤 했다.

부모는 왕천영이 대학 입학 후 중국으로 돌아가셨고, 왕천영 혼자 한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왕천영의 부모는 중국으로 와서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하지만 한국을 떠날 마음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공부한 만큼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이 왕천영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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