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이우탁 기자] 최근 미국을 비롯한 미동맹국, 서방국들의 대러 제재 확대에 따른 러시아의 고립 심화, 러시아 국내외에서의 반전 여론 확대,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러 제재국들의 지원 확대 등으로 수렁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형국임에도 이에 맞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결단과 대응은 마치 자신의 현재·미래의 정치인생을 걸고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동안 푸틴은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아왔다. 이것은 그의 권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커질수록 그것은 점점 훼손될 것이다. 또한 전비 부담 가중과 제재 확대로 인해 러시아 경제가 파탄으로 치닫는 상황으로 전개되면, 현실적이고 실용적으로 국익을 위해 국정을 살펴왔다는 푸틴의 이미지에 균열이 갈 것이다.

'푸틴적인 것'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 존재성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1997년 크렘린궁 총무국장으로 근무하던 푸틴은 그해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국립광업대학에서 "시장경제제도 형성기의 광물연료기지 재개발을 위한 전략"이라는 주제의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푸틴이 에너지부문의 국가통제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문을 통해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았다.

또한 푸틴은 연방보안국(FSB) 국장 시절인 1999년 1월 같은 대학 연구소 저널에 "러시아 경제발전을 위한 전략에서의 광물과 연료자원"이란 글을 게재했다. 이 기고문에는 러시아 경제에서 광물과 연료자원의 중요성과 거대기업 설립의 필요성, 에너지부문 개발과 통제, 그 이용에 관한 방안 등이 제시돼 있다.

푸틴은 러시아의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보장하고 국가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가 기능과 행위의 모든 영역에서 광물·연료자원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당시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한 경제구조 개혁이 경제성장의 전략적 핵심이었다. 이를 위한 방안은 국가가 광물·연료자원의 개발과 이용 절차에 대한 통제 및 규제권을 확보하고, 외국자본의 허용을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것 등이다. 나아가 그는 선진국의 다국적 기업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광물·연료자원 관련 산업에 국가지원을 확대하고, 정부가 다수지분을 차지하면서 수직적으로 통합된 거대 금융·산업기업을 설립해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푸틴의 구상은 2000-2008년 임기 동안 실체적으로 구현됐다.

이 시기의 러시아 경제전략은 '경제 및 산업구조에 대한 국가통제'라는 점에서 국가자본주의와 닮아 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적 시장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시장자율성의 힘을 넘어서는 심각한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혹은 정치적·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국유화와 국가 개입이 필요한 경우에 국가 주도 자본주의 현상이 나타났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발 글로벌 경제·금융위기에서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실시한 국유화와 국가 개입, 1930-1940년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 군국주의 등에서의 정치적·군사적인 목적을 위한 전방위적 산업 통제 등이 그 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속한 산유국들이 1973년 석유파동을 계기로 석유공급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1960-1970년대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신흥공업국들이 압축성장을 위한 경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 등에서도 국가자본주의 현상이 출현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시도하는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 러시아와 중국의 경우가 그렇다. 국가자본주의 현상이 개발도상국을 포함해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이유는,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한 국가가 기존의 자본주의 선진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을 동원해 생산자원 집중과 통제를 통한 압축성장을 추진하는 것이 가장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2000년대 글로벌 경제는 시장자율성과 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 자유무역 등이 추구된 신자유주의 경제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푸틴은 세계경제 조류에 역행하는 국가 주도 경제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파탄에 빠진 러시아 경제를 살려내야 했다.

옐친 시기(1991-1999년)의 체제개혁은 러시아적 정체성과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도입과 일관성 없는 임기응변식 정책 추진, 미비된 관련 법체계 등으로 만성적인 마이너스 성장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대규모 실업 등을 야기하며 국민경제를 도탄에 빠지게 했다. 옐친 집권 기간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은 40%이상 축소됐고, 국민실질화폐소득도 54%까지 주저앉았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992년에만 2510% 폭등했다. 이후 누적상승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임금체불의 급증과 실업증가로 인해 전체 인구의 40%가 넘는 6000만 명이 월 소득 800루블(31달러) 수준에 머물러 극빈층으로 전락했다.

더욱이 국유재산의 사유화 과정에서 정치권과의 밀착을 통해 형성된 소수 과두재벌인 '올리가르히'에 의한 국부약탈과 경제독점은 사회부패를 조장하며 약탈적 자본주의로 변질됐다. 소수의 특권적 경제귀족층(신흥 재벌)의 형성과 부상은 계층 간·지역 간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옐친 사임 직후인 2000년 1월 브치옴(VTsIOM·국영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옐친 시대가 가져다준 좋은 점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해 응답자들은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를 1순위로 지목했으나, 복수선택임에도 응답비율은 23%에 불과했다. 뒤이어 배급과 순번제도 해결 16%, 개인재산권 부활과 자유로운 경제활동 허용 13%, 개인의 자유 12% 등이었는데 모두 10%대에 불과했다. 반면 "옐친 시대가 가져다준 안 좋은 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응답자의 40%가 경제위기와 생산 감소를 지적했고, 기업도산과 대규모 실업 36%, 생활수준의 악화와 국부 및 구매력 하락 34%, 인플레이션과 저축의 가치하락 32% 등 경제문제가 모두 30%를 넘어섰다. 러시아 국민들은 옐친 시대의 경제개혁 실패를 잊고 싶어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글로벌화'라는 세계경제 패러다임의 변화 가운데서 러시아는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새로운 경제발전전략을 추구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 앞에 서 있었다. 러시아로선 서구의 다국적 기업과의 경쟁에서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기업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전 산업 부문에 걸쳐 우선순위와 경쟁우위를 명확히 설정한 후, 구조조정과 산업 간·산업 내 기업들의 기업인수합병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단기간에 구축해야 했다. 옐친 시대 사유화 과정에서 금융·산업집단이 형성돼 1996년 46개에서 1998년 77개로 늘어났고, 소속기업도 711개에서 1200개로 증가했지만 실질적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집단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과정에서 올리가르히가 소유와 경영을 독점하고 정권과 결탁해 자신의 이익과 횡령에 집중하면서 기업집단의 경쟁력 약화와 국민경제 발전에 악영향을 미치는 행태를 보였다. 산업 간·기업 간 자율적 구조조정을 통해 산업 및 기업부문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유도해 경제회복과 발전의 동력을 확보해야만 했지만, 경쟁이나 변화를 꺼리는 올리가르히가 국가경제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그 실현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올리가르히의 문제는 2000년대에 들어서도 완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2003-2006년 레바다 센터의 여론조사에서 "러시아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해 올리가르히가 지배하고 있는 기업들의 약탈적 행위와 그들의 국가경제부흥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응답이 2003년 37%, 2004년 34%, 2005년 29%, 2006년 33%로 '부패 및 관료주의'에 이어 두 번째 순위로 나타났다.

이 외에 국제에너지가격의 장기 상승과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중남미 국가에서의 자원민족주의의 확산은 천연자원에 대한 국가통제의 필요성을 더욱 유인했다. 석유·가스로 대표되는 에너지자원은 러시아의 경제성장과 연방예산수입, 수출, 무역수지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에너지산업에 대한 국유화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2004년만 보더라도 러시아의 에너지부문은 국내총생산의 26.9%, 수출의 56.5%, 연방세수의 41.2%를 차지할 정도로 국가경제에서의 비중이 타 부문을 크게 상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국제에너지시장에서 막강한 지배력을 보유했던 러시아로서는 에너지자원을 외채상환과 경제성장, 국민생활 향상 등을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고 에너지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선 이전 옐친 시기에 민간으로 이양된 에너지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에 귀속시킬 필요성이 절실했다.

한편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러시아적인 정체성과 존재적 특성도 푸틴의 국가자본주의와 중앙집권적 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통문화와 관습적 종교로서의 러시아 정교는 정치체제의 정당성과 체제옹호 이념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중앙집권적·권위주의적 정치체제 형성을 비롯해 반서방, 제국주의적 대외정책과도 연관돼 있다. 정교신앙은 러시아인들이 국가권력과 지배자들에게 순응하게 하는데도 기여했다. 러시아 정치 엘리트들은 반서방과 제국주의 정책을 정교신앙의 메시아니즘과 연계해 정당화했다. 러시아인들에게 사회주의 확산이나 제국주의 정책을 신의 사명으로 인식하도록 주입돼 왔다.

또한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유럽문명을 선망하고 모방하면서도 적대감을 갖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 왔다. 고대 러시아는 비잔틴의 동방정교를 통해서 그리스와 로마문명을 접했다. 이후 서구화 정책, 계몽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이 러시아 사회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 대부분은 서구유럽에서 온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유럽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러시아인들의 내면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유럽의 문명적 자산을 선망·모방하면서도 끊임없이 유럽을 부정하지 않으면 고유한 러시아의 전통성과 지정학적 특성을 지켜낼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러시아인 특히 엘리트들의 의식을 지배했다. 유라시아주의자들의 경우, 유럽을 안보적·문화적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럽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것이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생존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러시아 엘리트의 입장에서 유럽의 민주주의나 자유사상 유입은 자신들의 체제와 기득권에 대한 위협이었다. 후진적인 농노제를 유지하며 이익을 독식했던 제정러시아 시기의 귀족과 영주들에게 유럽의 계몽주의 물결은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소련 지도자들도 서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경계했다. 서구의 시장자본주의와 자유무역질서를 향유하면서도 반서방주의와 권위주의 체제의 타(舵)를 놓지 않는 푸틴 정권 역시 같은 맥락 속에서 중앙집권적 전체주의 전통을 적절히 활용했다.

러시아의 지배층들은 서구에서 들여온 사상이나 제도를 그대로 이식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전통과 실정에 맞게 변용시켜왔다.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따라 인민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강력한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했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옐친 시대 서구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체제전환을 시도했지만, 푸틴 시대로 넘어오면서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를 앞세운 개혁에서도 러시아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유럽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외부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고유한 독자성을 추구하려는 러시아적 성향과 맞물려 있다. 뿐만 아니라, 외부세력의 침략과 문명적 위협에 자주 노출돼 왔던 러시아의 역사적 배경과도 연관돼 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략 등에 대항한 러시아 민중들의 투쟁 역사, 서구화 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등장한 유라시아주의, 서구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거부와 전제적·중앙집권적 통치, 유럽의 마르크스주의를 변용한 소련식 사회주의 등에서 그러한 맥락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성향도 아시아와 유럽의 침략에 노출돼왔던 역사적·지정학적 배경이 반영돼 있다. 때문에 외부의 안보적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는 길은 영토를 선제적으로 확장하고 지정학적 요충지들을 선점하는 팽창정책이 우선시된 것이다.

체제전환 과정이었던 옐친 시대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적인 정체성과 존재성이 간과되거나 은폐된 채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에 의존함으로써 통치력의 누수와 부패로 인한 파국을 자초했다. 러시아는 소련 시기까지 국가가 토지, 천연자원, 노동 등의 생산요소를 소유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개인의 영리활동과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문화를 발전시켜본 적이 없었다. 2000년대에도 러시아인의 25% 정도가 개인재산권 보호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나머지 대다수 국민들은 천연자원이 국가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보다는 무능한 통치자로 인한 국가의 쇠락에 러시아인들이 냉소적이라는 것을 감지했던 푸틴은 2000년 대선 캠페인에서 자신의 국정원칙을 "강한 국가, 애국심, 법에 의한 독재, 가족의 가치, 빈곤 퇴치, 공정한 사업 환경"이라고 선언했다.

2000년 대선 직후 브치옴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푸틴에게 이끌린 매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46%가 원기 왕성한 젊음과 강한 의지 및 결단력을 첫째로 꼽았다. 국내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에 29%, 체첸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지속할 것이다 21% 등이 뒤를 이었다. 푸틴이 당시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자본주의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러시아 국민들의 수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후 8년 동안 푸틴이 추진했던 경제발전전략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바탕을 두고, 러시아적 특성과 현실적 요인을 반영한 국가 주도 경제질서확립과 경제발전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이 기간의 푸틴식 국가자본주의는 자원배분을 주도한 주체가 국유화를 통해 경영권을 확보한 정부 및 국영기업이라는 점에서 국가 주도형이었으며, 에너지·군수·전략산업 등 특정 산업을 대상으로 선별적 자원배분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불균형경제발전전략이었다.

푸틴의 민간기업 재국유화는 옐친 시대 국유기업의 사유화와 달리 산업 전반에서 동시에 진행되지 않고 선별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을 택했다. 국유화는 군수산업과 전력, 석유, 천연가스 등 정치적·군사적인 의미를 가지거나 국제 분업에서 경쟁우위를 지닌 부문에서 최우선적으로 추진됐으며, 다음 단계에서는 항공, 우주, 기계제작, 조선, 원자력, 금융 등 국민경제발전에서 전략적 의미를 지니는 산업 부문으로 확대됐다.

이와 함께 외국기업에 대한 통제도 강화됐다. 에너지·전략산업부문에서 외국자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거나 반강제적 몰수를 강행하기도 했다. 2006년 환경법령 위반을 빌미로 미국의 '로열더치셸'로부터 사할린프로젝트Ⅱ의 지배권 인수, 2007년 TNK-BP로부터 코빅타(Kovykta) 가스전 지분회수, 2008년 전략산업 선정을 통한 외국자본 유입 억제와 정부지배 강화 등이 그 예다. 이 외에 2008년 8월 확정된 전략산업 외국인투자 절차법의 적용을 받는 전략기술인 세포기술, 나노기술, 생물공학, 수소기술, 재생에너지 기술, 정보의 가공·저장·전송 및 보안 기술, 인공네비게이션체제 개발기술, 합성물질·세라믹·크리스털·폴리머 가공기술, 친환경 천연자원 추출 관련 기술 등도 정부 관리 하에 있었다.

푸틴의 국유화 정책은 국가경제에서 정부 역할의 전략적 확대를 의미했다. 유럽부흥개발은행에 따르면 러시아 국내총생산에서 국가부문의 비중은 사유화가 완료된 1997년부터 2004년까지 30% 수준을 유지했으나 재국유화가 본격화된 2005년 이후에는 그 비중이 35%로 증가했다. 전체적으로는 5%라는 수치가 크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연료·에너지 및 특정 전략산업 부문에서는 정부 비중이 특히 두드러졌다.

광물자원 채굴에서 정부 비중은 2005년 5.5%에서 2008년 상반기에는 13.7%로 급증했다. 러시아 은행산업의 총 자산에서 정부지배 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3년까지 40% 미만이었으나, 2008년에는 55%까지 확대됐다. 증권시장에서도 정부소유 주식지분은 2003년 3월 24%에서 2007년에는 약 40%로 급등했다. 반면 민간 지분비중은 2004-2008년 동안 거의 20% 감소했다. 러시아 400대 기업에서 정부가 경영권을 가진 기업 수는 2004년 81개에서 2006년 103개로 확대됐다. 같은 기간 동안 총 매출액은 1450억 달러(GDP 대비 25%)에서 5% 상승한 2830억 달러로 400대 기업 총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4.7%에서 40%로 늘어났다.

또 한편으로 이 기간 푸틴은 경제 안정보다는 성장에 더 무게를 두었고, 내수시장보다는 수출시장을 지향했다. 더불어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고용과 물가, 국제수지에서의 안정을 이루고 분배에서의 형평을 추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는 푸틴 이전의 러시아 경제가 처한 마이너스 경제성장과 대규모 실업, 대외부채 상환 문제 등을 해결하고 강한 러시아로 나아가는데 실효성 있는 전략으로 받아들여졌다.

푸틴은 이 기간 국정연설을 할 때마다 세계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하기 위해서는 빠른 경제성장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2003년 연두교서에서 제시된 목표가 실현가능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2004년 12월 연두교서에서는 2010년까지 7년 내에 경제규모를 2배로 키우겠다고 재공언했다. 2007년 '러시아 연방 장기 사회·경제발전 구상'에서도 성장정책에 대한 푸틴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다.

옐친 시대 러시아 경제는 친서구적 시장경제 옹호자들인 올리가르히에 의해 좌우됐다. 당시 올리가르히의 좌장임을 자처했던 베레조프스키는 국가 안보회의 부의장이던 1996년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포함한 7명의 최고 은행가가 러시아 경제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으며, 정부의 경제정책에 절대적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각종 조치를 정부에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2000년대의 푸틴시대 러시아 경제를 이끈 주도 세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율사와 경제관료, '실로비키'로 지칭되는 군부, 국가안보위원회(KGB) 출신의 보수 강경파 그룹 등이었다. 당시 율사 및 경제관료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드미트리 코작, 알렉세이 쿠드린, 게르만 그레프, 알렉세이 밀러 등이 포진했고, 군부 및 구KGB 인맥으로는 이고르 세친, 세르게이 이바노프, 빅토르 이바노프, 니콜라이 파트루세프, 레오니드 레이만, 빅토르 체르케소프 등이 대표적이었다.

2007년 말 기준, 장관급 이상 중앙정부 고위관료 8명이 가즈프롬을 비롯한 러시아 주요 국영기업 7개의 이사회 의장직과 9개 국영기업의 이사직을, 대통령 행정실 소속 행정관료 7명이 로스네프트를 포함한 7개 기업 이사회 의장직과 12개 기업 이사직을 장악했다. 세계최대 천연가스 생산업체인 가즈프롬은 총 11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제1부총리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의장을, 에너지부 차관 알렉세이 밀러가 회장 겸 이사회 부의장을, 게르만 그레프, 빅토르 흐리스텐코, 이고르 유스포프 등 5명의 장관급 이상 고위관료를 포함해 총 7명의 정부관리가 이사회에 포진됐다. 러시아 제1의 석유생산업체인 로스네프트에는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 겸 대통령 보좌관인 이고르 세친이 의장을, 부총리인 세르게이 나르쉬킨이 부의장을 맡는 등 9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5명의 정부 관료가 이사로 참여했다.

1993년 어느 봄날 필자
1993년 어느 봄날 필자

그런 가운데,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경제위기는 푸틴의 국가자본주의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국유화와 규제 강화로 인한 러시아 경제구조의 경직성은 세계경기침체로 인한 국제유가의 급락과 같은 대외 경제변수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렇지만 푸틴식 전략은 신자유주의의 시장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점도 있었다.

러시아는 당시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다른 브릭스(BRICs) 국가나 신흥공업국 시장에 비해 훨씬 큰 경제 충격을 받았음에도, 적시에 부실기업 및 산업에 대한 대규모 구제 금융을 실시하고 공격적인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환율안정을 이끌어 위기를 헤쳐 나갔다. 이는 정부 주도의 신속한 결정과 에너지산업 국유화를 통해 조성된 대규모의 준비기금 및 국부펀드 덕분이었다. 2004년 1월 급격한 유가파동으로 인한 경제충격을 예방하려는 대비책으로 조성된 석유안정화기금은 2008년 2월부터 준비기금과 국부펀드로 나눠져 운영됐는데,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9월 말 그 규모는 각각 1410억 달러, 487억 달러에 달했다.

집권 1-2기 동안에 초기의 구상을 실체화시켰던 푸틴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신과 러시아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장기 구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이우탁 편집국장 newswatch@newswat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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