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이우탁 기자] 1999년 러시아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 당시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보리스 옐친이 펼친 개혁과 개방정책은 이런저런 이유로 국가체제와 국민경제를 약화시켰다. 당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탐욕에 눈이 먼 러시아 개혁파들과 이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했던 미국 정부의 관료들이 러시아의 파탄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서구식 사유화 과정에서 국부를 약탈해 독점하던 올리가르히(신흥재벌)가 경제개혁 실패와 체첸전쟁의 여파로 지지율이 떨어진 옐친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개혁파와 야합함으로써 러시아의 위기를 더욱 재촉했다는 지식인들의 주장도 있었다.

실상, 문제된 야합은 금권·타락선거를 유발했고, 그 과정에서 옐친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 올리가르히의 이익을 계속 보장해줘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결국 야심찬 개혁이 뒷전으로 밀리는 수렁에 빠진 러시아에 대해 당시 미 정부관료들이 보인 행태 역시,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것만 아니면 무엇이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전개됨에 따라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단적인 예로, 러시아 개혁파의 기수였던 아나톨리 추바이스의 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추바이스는 옐친 집권기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경제개혁과 사유화 프로그램을 결정하고 정책화하는데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던 전문가였다. 모스크바에 처음 왔을 때, 아파트 없이 무일푼이었던 추바이스는 7여년 동안 경제개혁을 지휘한 후에도 옐친 정권의 주변을 맴돌다가 과두적 금융산업그룹(올리가르히)의 하나인 연합에너지시스템의 총수를 맡기도 했다. 옐친 정권 말기, 추바이스 측근들이 운영하는 미 하버드대학교 국제개발연구소로 3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유입된 사실이 포착돼 관련자들이 조사를 받았다.

당시 푸틴의 세계관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도 특정한 정치 이념과 사상체계가 정립돼 있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했다. 푸틴은 젊은 시절 KGB에서 업무능력과 인간관, 국가관 등을 배양했다. 소련 말기인 1989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귀국했던 푸틴이 이듬해 처음 맡았던 일은 레닌그라드대학교 대외관계 자문이었다. 그곳에서 푸틴의 핵심 업무는 KGB를 위해 학생을 선발하고 양성하는 것과 외국인 학생들을 감시하고 교수들의 대외활동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시기 레닌그라드에서 개방성과 실용성에 대해 사색했다.

레닌그라드대학교 교수였던 아나톨리 소프차크가 레닌그라드 시(市)의 시의회 의장이 되자 푸틴은 KGB를 사직하고 소프차크의 정치담당고문이 됐다. 1991년 여름에 소프차크가 시장으로 선출되자 푸틴은 3명의 부시장 중 한 명이 됐으며, 동시에 신설된 대외관계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됐다. (레닌그라드 시 명칭은 1991년 9월6일 시민투표로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시명으로 복원됐다.)

소련이 붕괴의 길을 걷고 있던 때는 무질서와 불안이 만연하고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던 시기였다. 시장으로 선출된 소프차크는 자신에 대한 경호 강화와 질서 유지를 위해 보안부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KGB 레닌그라드 지부는 소프차크에게 푸틴을 추천했다. 때마침 소프차크 교수의 제자이기도 했던 푸틴은 당시 KGB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과거와 결별해 자신의 생각을 구현할 더 큰 세계로 도약하고 싶어했다. 푸틴은 1996년 소프차크가 시장 재선에 실패할 때까지 부시장으로서 그의 곁을 지켰다.

푸틴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에서의 경력은 개혁 세력과의 인맥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됐다. 개혁파의 기수인 아나톨리 추바이스와의 만남은 후일 푸틴이 대통령이 되는데 근본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추바이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인맥의 대부였으며, 러시아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추바이스는 옐친 정부에서 부총리겸 러시아국가자산위원회 의장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 이전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경제담당 고문으로 일했을 때 푸틴과는 동료였다.

푸틴은 1998년 7월 KGB의 기능을 이어받은 연방보안국(FSB) 국장으로 취임한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면서 KGB 출신(실로비키)인 인사들로 자신의 인맥을 강화해갔다. 실로비키는 무력과 관련이 있는 관공서의 고위급 관리뿐 아니라 과거에 이러한 부서에서 일했던 고위 관료, 정치인, 기업인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범주를 지칭하지만, 푸틴 집권기에는 크렘린과 실로비키의 핵심인 구KGB와 FSB 출신인사들의 연합을 일컬어 '크렘린-류뱐카 연합'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실로비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시장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경제인들과 행정 관료들 중에 푸틴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포함됐다. 또한 잠재적으로 유망한 회사나 은행의 중역진이면서 FSB의 영향권 내에 있는 인사들도 그러했다. 하지만 실로비키는 게르만 그레프나 알렉세이 쿠드린 같은 자유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들과 제휴한 것뿐이었다. 실로비키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실로비키 연합세력은 권위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강조하는 국가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나 지식인들로부터도 충원되기도 했다. 이것은 실로비키의 세계관과 국가관을 짐작하게 해준다. 실로비키의 세계관은 소련 시대의 공산당 지배구조에서 공산당과 공산주의와 관계된 것만을 벗겨내면 유사하거나 공통된 부분이 많다. 다시 말해서 실로비키는 국가 지상주의나 민족주의의 대변자로 볼 수 있다. 그들이 우파와 좌파 러시아 민족주의자들과 다른 지점은 시장개혁과 자본주의로의 체제전환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 실로비키의 정책 성향은 국가주의 경제 모델과 국가 통제를 중요시하며, 산업정책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우선시하고 전략산업의 경우엔 국유화와 재국유화, 국가통제 등을 선호했다.

2002년 한 연구보고서에서 대통령부 직원의 50-70%가 실로비키였다. 1993년 옐친 시기에는 11%가 그들이었지만, 2002년에는 러시아 지배엘리트의 25%가 군부와 보안기관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사적인 부문으로 진출하더라도 과거의 동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실로비키는 국가 경제에서 직·간접적으로 더 큰 몫을 획득하는 일에 가담한다는 점에서 강력한 이권집단이기도 했다.

푸틴 역시 넓은 의미에서 실로비키 세력의 일원이라고 볼 수 있다. 집권 초기의 푸틴은 실로비키가 옐친 패밀리나 올리가르히 등과 대립할 경우, 실로비키만을 편들지 않았지만 본질적으로는 실로비키의 세계관과 동일했다. 푸틴은 실용주의 입장에서 접근했던 대외정책과 달리, 국내 정책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실로비키의 입장에 동의했다. 특히 푸틴의 국가관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분야들 중 하나는 올리가르히와 비판적 미디어에 대한 태도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의 미디어들 중 특히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컸다. 그 기세는 텔레비전 방송망 확대와 채널 수 증가로 이어졌다. 이 중에서 전국방송을 하는 3대 텔레비전 방송국이 중요한데, 국영방송인 러시아 텔레비전(RTR), 반국영 반민영 방송인 러시아 공공 텔레비전(ORT), 민영방송인 독립 텔레비전(NTV) 등이 그것이다.

푸틴이 집권하기 시작했을 때 ORT와 NTV는 각각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등 올리가르히의 지배 하에 있었다. 올리가르히들은 미디어를 정부나 정적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구신스키의 경우, 옐친 정부 때 미디어를 활용해 선거 캠페인에서 옐친 지지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정권과의 관계가 좋았지만, 옐친이 물러나고 치러진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주의 정당 야블로코의 당수인 그레고리 야블린스키를 대통령 후보로 밀면서 푸틴과의 악연이 시작됐다. 구신스키에 대한 최고검찰당국의 추방활동이 시작된 것은 푸틴 정권이 시작된 직후인 2000년 5월이었다. 결국 NTV의 주식 46%를 소유하고 있는 가즈프롬 미디어가 주주총회를 열어 경영진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NTV를 접수하고 새 경영진을 인정하지 않는 직원들에게 권고사직이 이뤄졌다. 구신스키는 자신이 소유한 주식을 미국 CNN의 창설자 테드 터너에게 양도했다.

베레조프스키는 2000년 대선에서 푸틴의 당선을 도왔다. 그랬던 그가 푸틴에게 공공연히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 5월 푸틴이 상원개혁법안을 제출했을 때부터였다. 베레조프스키는 당시 하원의원의 신분이었는데 상원개혁법안을 공개비판하고, 같은 해 7월 하원에 사표를 제출했다. 베레조프스키는 푸틴과 거리를 두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건전한 야당을 조직하겠다고 공언했다. 9월에 베레조프스키는 자신의 ORT 관련 주식을 포기하고 14명의 인사들에게 위탁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공개하면서 ORT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2001년 ORT 주식의 49%를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양도하고 ORT 경영권을 포기했다. 이 밖에도 모스크바 주변 지역을 권역으로 하는 TV6도 석유기업 루크오일의 개입으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TV6 역시 베레조프스키가 75%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년을 못 넘기고 폐쇄돼 국영스포츠 전문방송으로 전환됐다.

푸틴이 집권 1기때에 몇몇 올리가르히와의 관계악화는, 푸틴이 대통령 권한 대행 시절 올리가르히 대표와의 면담에서 양자가 합의한 사항을 포함해 2000년 7월 푸틴이 언급했던, 올리가르히가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면 올리가르히의 비즈니스에 개입하거나 그들의 자원산업을 재국유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올리가르히가 먼저 어겼다고 푸틴이 판단한 데에 기인했다.

푸틴은 집권 초부터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를 매개로 국제정치와 세계경제 무대에서 '강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정책을 일관되게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 확보 목적으로 국내의 에너지자원산업에 대한 국가 개입과 통제를 일사천리로 강화시켜나갔다.

민간 자원기업에 대한 정부 개입과 통제의 분수령이 된 2003년 유코스 사태는 외국자본의 러시아 자원 소유에 대한 지분 매집에 제동을 거는 시발점이 됐다. 러시아 최대의 민간 석유기업이었던 유코스는 2003년 4월 동종 기업인 시브네프트와 합병을 시도했고, 새로운 합병 기업 유코스-시브네프트는 주식 25%를 미국 석유기업 엑슨 모빌과 셰브론텍사코에 매각하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교섭에 들어갔다. 실로비키가 이 사실을 포착하자 즉각 행동에 옮겨, 2003년 10월 유코스의 경영자였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사기 및 횡령, 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어 2004년 4월, 34억 달러 규모의 체납 세금이 강제 추징됐으며 추가 세무조사를 통해 총 납세부담액이 240억 달러로 늘어났다. 이는 유코스의 매출액보다 많은 액수로 납부가 불가능했다. 2004년 10월 구소련의 중앙은행 총재 빅토르 게라시첸코가 신임 사장으로 선임됐다. 같은 해 11월 핵심 자회사였던 유간스크네프테가스가 러시아 국영 가즈프롬과 로스네프트의 바이칼 파이낸스그룹에 93억 7000만 달러에 매각되면서 유코스는 사실상 해체됐다.

유코스 사태를 통해 엿볼 수 있는 푸틴의 속내는, 에너지 부문의 올리가르히가 국가경쟁력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여론을 바탕으로 그들에 대한 정리작업을 하는 동시에 소유권을 국가 부문으로 이전하면서 글로벌 원유 가격 폭등 현상에 편승해 국가가 자원을 독점한 뒤, 이에 따른 경제성과를 정권 유지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먼저 국내 경제의 재편과 함께 유력한 에너지자원산업의 국가독점내지 국가개입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했다.

실로비키는 집권층 내부의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유코스 사태를 기점으로 이러한 의도를 지속적으로 관철시켜나갔다. 예를 들면, 당시 푸틴 집권1기의 총리 카시야노프와 전력독점기업 통일에너지 시스템즈(UES) 사장인 아나톨리 추바이스가 2003년 10월 최고 검찰청의 유코스 주식 압류에 대해 반발했고, 대통령 행정실장 알렉산드르 볼로신은 실로비키가 기획한 호도르코프스키 체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이유로 행정실장직을 사임했을 때 푸틴은 침묵했다. 또한 2006년 7월 푸틴은 가즈프롬에 가스 수출에 관한 독점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가스수출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에너지자원에 대한 국가통제정책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결과적으로 국영기업그룹의 세력확장과 독점권 확대는 에너지 자원을 무기로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핵심 토대가 됐다.

푸틴은 집권초기부터 실로비키를 크렘린의 엘리트그룹 중심에 두고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와 러시아적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권위주의 정권이 그러하듯, 푸틴의 집권 기간이 길어질수록 대내외적으로 불가피한 변화와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특히 푸틴은 2011년 총선에 이어 2012년 논란이 많던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직후, 자신의 정치 노선에 러시아적 정체성과 역사성, 애국주의 등을 확실하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직감했다.

2011년 12월 총선에서 여당인 통합러시아의 득표율이 크게 하락했다. 그것은 러시아 국민의 집권세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반영된 당연한 결과였다. 반면 3개월 후인 2012년 3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푸틴은 초반의 약세를 극복하고 1차 투표에서 당선을 결정지었다. 1993년 치러진 제1기 총선(국가두마 선거·러시아연방하원 선거)을 제외하고 그 동안 치러진 국가두마 선거는 집권세력의 과거 실적에 대한 평가가 반영된 투표 경향을 보여 왔다. 2011년 12월 4일 총선 또한 2000년부터 2008년까지의 푸틴 집권 1-2기와 2008-2011년 메드베데프 정부 시기를 거친 집권세력에 대한 투표 경향도 마찬가지였다.

총선에 앞서 2011년 3월 13일 지방선거에서 하원에 진출한 4개 정당 중 통합러시아는 12개 주 의회 총 547석 가운데 70%에 육박하는 375석(68.56%)을 획득함으로써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뒤이어 공산당이 71석(12.98%), 정의러시아가 48석(8.78%), 자민당이 33석(6.03%)을 각각 확보했다. 그러나 러시아 내에서는 지방선거 결과를 통합러시아의 불안한 승리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왜냐하면 정당명부식 완전비례대표제 방식으로 치러질 총선을 고려할 때 중요한 것은 각 당의 확보 의석이 아니라 정당 지지율이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에서의 각 당의 평균지지율은 통합러시아가 약 50%, 공산당 22%, 자민당 15%, 정의러시아 14%를 나타냈다. 이것은 통합러시아의 지지율 하락세가 심각한 수준에 진입했음을 의미했다.

60.4%의 투표율을 기록한 2011년 12월 총선에서 여당 통합러시아는 238석(49.32%), 공산당 92석(19.19%), 정의러시아 64석(13.24%), 자민당 56석(11.67%)을 각각 확보함으로써 우려가 현실이 됐다. 통합러시아는 2007년 총선에서 64.3%의 지지율로 전체 의석비율의 70%에 달하는 의석을 획득해 단독으로 개헌을 추진할 수 있는 압도적 다수 의석을 확보한 바 있었다. 하지만 2011년 총선에서 통합러시아는 2007년과 비교해 득표수에서 1200여만 표, 득표율에서 약 15%, 의석수에서 77석 감소한 저조한 성적을 냈다. 통합러시아는 7% 진입장벽을 넘지 못한 정당들의 원내 진출 실패에 따른 의석 재분배를 통해 간신히 단순 과반 의석을 확보한 것으로 겨우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야당은 총선에서 집권 통합러시아에 반대하는 유권자의 표를 효율적으로 획득함으로써 공산당은 35석, 정의러시아는 26석, 자민당이 16석을 2007년 총선 대비 추가로 확보했다.

2011년 총선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통합러시아의 지지율 하락이 계속됐다는 것이다. 전러시아여론연구센터(브치옴)에 따르면 통합러시아의 지지율은 2011년 8월에 55.3%, 10월 53.8%, 11월 53.7%로 지속적인 하락 경향을 보였고, 실제 선거 결과도 49.32%에 그쳤다. 그 동안 러시아에서 푸틴과 통합러시아의 지지율 관계는 푸틴의 지지율이 여당의 지지율을 견인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 왔다. 때문에 2011년 12월 총선에서도 통합러시아는 지지율 하락세를 극복하기 위해 푸틴효과를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통합러시아는 총선 직후에 차기 대선 후보를 발표하던 기존 관례를 깨고 총선 전인 9월 말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푸틴을 공식 추대했다. 통합러시아가 푸틴의 정당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지지율 반등을 노렸으나 그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통합러시아는 지지율 반등을 위해 다각도로 다른 방법들을 동원했지만 이 또한 급격한 지지율 저하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것은 러시아 국민의 집권세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생각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심화돼 있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부터 비롯된 경제상황 악화, 만성적인 부패, 경쟁 없는 정치체제 등에 대한 점증하는 비판 여론의 심화와 푸틴에 대한 피로감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였다.

푸틴과 통합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만성적 부패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인식이 더욱 염려스러웠다. 2011년 11월 레바다센터의 발표자료에 따르면 "대다수 국가관료들이 법의 통제밖에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85%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또한 "대다수 정치인들이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도 이에 동의하는 응답이 85%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는 국가관료와 정치인들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불신감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뜻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알렉세이 나발니는 통합러시아가 스스로를 실천당이라 부르는 것을 비꼬아 '사기꾼과 도둑놈들의 당'이라고 규정하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총선에 이어 2012년 3월 4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4년 전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금지하는 헌법 규정 때문에 2008년 5월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던 푸틴의 대권 복귀를 결정짓는 선거였다. 실제로 당시 대선에서 푸틴의 당락 문제는 쟁점 거리가 되지 못했다. 4명의 야권 후보 가운데 푸틴과 경쟁할만한 상대는 없었다. 레바다센터가 2012년 1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번 대선에서 누가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8%가 푸틴을 꼽았으며 뒤이어 주가노프 3%, 지리노프스키 2%, 프로호로프 1%, 미로노프 1%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어 2월 12일 실시된 조사에서도 푸틴을 꼽은 응답자 수가 78%에서 80%로 2% 증가했을 뿐, 큰 차이 없이 되풀이됐다. 이는 러시아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푸틴에 대한 지지 여부와 관계없이 푸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2012년 대선은 러시아연방 출범 이후 1996년 직접투표에 의해 러시아 국민이 옐친의 재선을 추인한 이래로 2000년, 2004년, 2008년에 이어 5번째로 치러지는 선거였다. 특히 이 대선은 2008년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추진한 부분 헌법 개정의 결과로 기존 4년에서 2년 늘어난 6년 임기의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당선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장기 집권과 민주주의 후퇴라는 국내외의 비판에 직면한 푸틴의 대선 최대 과제는 러시아 유권자의 압도적 지지를 통한 당선이었다. 왜냐하면 들끓는 비난 여론 속에서 푸틴의 대권 복귀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획득해야만 그 정당성이 획득될 수 있고, 그래야만 안정적인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64.71%의 투표율을 기록한 2012년 대선에서 푸틴 후보는 63.60%로 당선됐다. 푸틴은 83개 연방주체 지역 중에서 모스크바 연방시 46.95%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50% 이상의 표를 획득했다. 이로써 푸틴은 2004년 대선에서 획득한 71.3%와 2008년 메드베데프 70.3%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유효 투표수의 3분의 2에 육박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을 결정지었다. 푸틴이 대선과정에서 초반 약세를 극복하고 전세를 회복한 비결은 무엇일까?

대선에서 야당들은 직전 총선에서 나타난 통합러시아에 대한 비판 여론을 등에 업고, 여세를 몰아 더욱 공격적인 선거정책과 공약으로 푸틴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강하게 펼쳤다. 야권 대선 후보들은 총선에서 부각됐던 핵심 이슈인 '집권세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을 활용해 대선 캠페인을 주도하고자 했다.

그런 야권의 공세 속에서 푸틴은 역발상의 대담한 방식으로 선거 이슈 변경을 시도했다. 푸틴은 부정선거 규탄 시위라는 불리한 여건을 역으로 활용해 돌파구를 찾았다. 사태 초기 강경 대응방침을 바꿔 합법적 평화시위를 보장해 사태의 급진적 전개를 예방하는 한편, 시위 배후로 미국과 서방을 지목하면서 사태 전개의 새로운 국면을 시도했다. 푸틴은 당시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매케인 상원의원을 비난하면서 미 국무부를 비롯한 서방의 지원과 사주에 의해 러시아 내 일부 세력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푸틴의 이 같은 대응은 실제로 큰 효과를 발휘했다. 초기 급속히 확산되던 시위 양상이 점차 진정국면에 접어들었고, 규탄 시위와 그 주도세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국민들이 점차 늘어났다.

더불어 푸틴은 러시아의 안보 강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푸틴은 외국의 개입으로 정권교체 혁명이 일어난 리비아 등을 언급하면서 그 부정적 결과를 강조했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반복해서 러시아가 '오렌지 혁명'의 무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간섭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푸틴은 1990년대 체제전환의 혼란상을 경험한 러시아 유권자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푸틴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선거운동 막바지였던 2012년 2월 23일 '조국 수호자의 날' 모스크바 루쉬니키 경기장에 운집한 지지자들 앞에서 "러시아를 위한 투쟁은 계속된다", "누군가 우리 일에 간섭하고 우리에게 그들의 의지를 강요하도록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반서구주의와 애국주의 감성을 불어넣었다. 더불어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 주요 일간지에 연재한 기고문들은 자극적 네거티브 캠페인에 주력하는 야권 후보들에 비해 푸틴을 훨씬 책임감 있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비쳐지게 했다. 결국 푸틴은 총선에서 나타난 유권자의 비판적 투표 경향을 전환시켜 '과거'가 아닌 '미래'에 투표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역사관과 국가관에 새로운 인식을 심고자 했다. 그것은 구상되고 계획된 것이었다. 공교육의 역사교과서는 실상 당대 국가의 지배층이나 국정운영자들의 관점과 목소리가 관철돼 있는 담론이 지배하는 텍스트다. 역사교과서에 실린 내용은 해당 국가의 사회체제 유지 및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00년대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러시아 현대사 교과서는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교과서는 소련 해체 이후 출간된 기존의 역사교과서와는 다르게 스탈린 시대를 재평가함으로써 러시아의 학계와 언론계에 커다란 반향과 논란을 일으켰다. 그 논란은 푸틴 정권이 당시 검인 교과서들 중 유일하게 필리포프 교과서만을 공공연하게 지원하면서 더욱 달아올랐다. 러시아의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언론인들, 일부 서방 학자들은 필리포프 교과서를 푸틴 정권의 관제 텍스트로 규정하면서 비판을 쏟아냈다. 그들은, 필리포프 교과서가 스탈린 시대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방법을 통해 푸틴 정권의 정책과 제도를 미화하려는 시도라고 보았다.

2007년 봄, 러시아 언론은 새로운 중고등학교 11학년용 러시아 현대사 교과서의 출간이 임박했다고 보도했다. 이 교과서는 필리포프가 편집을 맡고 다닐린이 저자 중 하나로 참여했다. 역사학자인 필리포프는 러시아 정부의 싱크탱크 중 하나인 대외정책 국가연구소의 부소장이었다. 다닐린은 대표적인 친푸틴계열의 학자 글렙 파블로프스키가 만든 재단인 효율정치재단의 일원이었다.

본격적인 출간에 앞서 일선 학교 교사들에게 교과서의 내용과 함께 수업 방법 및 보충 자료가 담긴 교사용 지침서가 미리 공개됐다. 푸틴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러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필리포프 매뉴얼은 스탈린 시대의 정치적 탄압과 비민주적 행위들을 러시아적 국가중심주의 전통과 관점을 통해 그 시대가 처한 위기 국면에서 러시아를 지켜낸 효율적이고 정당한 정책들로 묘사했다. 이 같은 그들의 평가는 필리포프 매뉴얼이 푸틴 정권의 정책들을 체제전환 과정에서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적 안정을 이룩한 효율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판단하게끔 유추하거나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리포프 매뉴얼의 가장 큰 특징은 스탈린에 대한 변론이다. 매뉴얼은 1930년대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불가피했음을 교사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다. 스탈린 시대는 파시즘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소련에게는 지도체제의 불안정을 극복하고 신속하게 소련의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대안이 공포정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매뉴얼에서는 스탈린의 업적 중 위대한 애국전쟁의 승리와 소련의 산업화를 극찬했다. 또한 매뉴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선과 악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스탈린은 선한 세력의 지도자로 묘사했다. 때문에 스탈린의 범죄나 과오는 당시 특수 상황에 수반된 사소하고 불가피한 부작용쯤으로 합리화했다. 이러한 역사 기술(記述)은 푸틴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스탈린을 활용한 것이며, 스탈린 시대와 푸틴 시대의 유사점을 부각시켜 국민들에게 주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푸틴은 스탈린 시대의 정치적 탄압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삭제하는 작업에도 빈틈이 없었다. 스탈린 시대의 집단노동수용소로서 유일하게 역사적 흔적을 유지했던 페름(Perm) 수용소는 1995년부터 박물관으로 개조된 페름36은 시민 인권단체와 외국재단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페름36은 스탈린 시대의 정치적 박해와 인권 탄압의 피해자 명단, 수용소에서의 처참한 노역 등을 일깨워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푸틴은 2012년부터 박물관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기와 수도를 끊는가 하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노력도 가로막았다. 결국 2015년 박물관은 지방 정부에 의해 몰수됐고 수용소의 역사는 왜곡돼 당초 박물관 설립자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돼버렸다.

스탈린 시대의 문서는 소련 붕괴 이후 철저히 정보기관에 의해 은폐됐으며, 집단노동수용소와 같은 유적들은 파괴됐다. 푸틴과 메드베데프 역시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016년 기고문에서 편견이 가득찬 서유럽은 언제나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희생시키려 했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유럽 열강의 반러시아적 열망이 빚어낸 참사라고 규정했고, 유럽이 나치의 힘을 빌려 러시아인과 사회주의 소련을 몰락시키려 했다고 강조했다.

역사에 대한 해석과 주장, 관련 작업 등 이 모든 것은 소련 붕괴 이후 발생한 이념과 정당화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웠는지에 대한 문제로 수렴된다. 1990년대 러시아는 자유주의적 서구화의 길을 가고자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렇다고 다시 공산주의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결국 푸틴은 스탈린에 대한 미화와 나치에 대한 애국적인 승리의 기억을 러시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국민들의 패배주의를 탈각시키고 강한 러시아라는 자신감을 회복시켜줄 역사관을 구축하고자 한 것이 지도자로서 낭혜한 선택이었고 그 목적이 신성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의도는 정치적이고 반역사적인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014년 어느 날, 푸틴이 러시아의 중앙 및 지방 관료들에게 연휴 기간 동안 일독하라고 지시했던 책들이 있었다.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선의 정당화>, 니콜라이 베르댜예프의 <불평등의 철학>, 이반 일리인의 <우리의 소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들이 담고 있는 사상은 푸틴이 러시아의 정체성과 국제적 위상에 대한 시각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베르댜예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러시아 민족의 혼이 복잡하고 서로 얽혀있으며, 그 내면에는 역사적으로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개의 조류가 충돌하고 섞여있다고 주장했다. 일리인은 서구가 러시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를 슬라브 민족의 세계관·자연관·인간관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적시하면서 서구인은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러시아인은 감정과 상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기술했다.

그리고 러시아 국민의 삶과 국가통치에서 역사적으로 구심점에 있었던 러시아정교에 대해선, 러시아인들이 서양인들과는 다른 종교적 전통과 가르침 속에서 삶을 영위해왔다면서 러시아정교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성인(聖人)들과 신성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했고 불행한 역사적 운명을 견뎌낼 힘을 주었다고 베르댜예프는 피력했다. 러시아정교에 대해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일리인은 러시아정교가 역사적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차르(Tsar)와 신을 섬기는 자로서의 책임의식을 심어줬고, 무엇보다 영도자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신성한 믿음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해왔다고 기술했다. 이처럼 베르댜예프와 일리인 같은 종교철학자들의 관점에서는, 러시아인과 서구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러시아정교의 신성한 가치관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결합된 것이 러시아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푸틴은 그들의 사상이 자신의 통치권과 장기집권의 정당성에 이념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 추호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2013년 푸틴은 국가의 지속적 단결을 위해서 러시아 국민은 자신의 민족적·종교적 뿌리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공통된 가치, 애국심, 시민적 의무감과 일체감, 준법정신, 조국의 운명과 주권에 대한 책임의식 등을 가지고 국민적 정체성을 함양시켜야 한다고 공언했다.

러시아 정체성의 종교적 뿌리와 관련해 푸틴은 러시아를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유럽에 맞서 보수주의적 기독교를 수호하는 최후의 요새로 규정하면서, 유럽과 대서양 국가들이 서구문명의 기반인 기독교적 가치를 비롯한 역사적 뿌리를 거부하고, 모든 도적적 원칙과 전통적 정체성까지도 부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푸틴은 자신의 신학적 논리를 가감없이 펼치면서, 서구세력이 전통적 가족과 동성애 부부를 동일시하고 신에 대한 믿음과 사탄에 대한 믿음도 동일시하고 있다고 지탄했다.

이러한 푸틴의 신념은 "공산주의나 진보적 자유주의를 대신할 강력한 대안은 역사적 전통과 종교적 윤리관으로 이뤄진 신권주의적 통치제제"라는 이념에 닿아 있다. 러시아정교회는 커져가는 영향력과 푸틴 정권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보수의 강력한 대변인이 돼 푸틴의 통치권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1993년 어느 봄날 필자
1993년 어느 봄날 필자

드디어 푸틴은 숙원이었던 '그것'을 완수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정치일정에 돌입했다. 집권 4기의 임기를 4년 남긴 시점인 2020년 1월에 그는 개헌 제안을 했다. 그 개헌안은 소수의 측근 외에는 내각도 사전 인지를 못했을 정도로 비밀리에 구상된 것이었다.

그 해 4월로 예정돼 있던 국민투표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7월 1일로 연기되기는 했지만, 개헌 작업은 속도를 냈다. 5월 레바다센터의 여론조사에서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푸틴 정부가 보여준 대처 방식에 대한 불만과 경기침체에 따른 점증하는 불만이 국정 지지도를 59%까지 떨어뜨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치러진 개헌 찬반투표는 투표율 67.97%에 찬성 77.92%, 반대 21.27%, 기권 0.81%라는 결과를 냈다. 7월 2일 푸틴은 투표결과에 대한 대국민 연설을 통해 러시아가 정치체계의 개선과 사회적 보장 강화를 이뤘고 주권과 영토 보전 또한 강화됐으며 세대를 아우르는 역사적·도적적 가치도 수립됐다고 선언했다.

당시 서방 측은 러시아 개헌의 내용과 투표 진행 방식에 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관련 보도를 인용하면서 개헌 투표 다음날인 7월 2일 러시아 정부가 투표 강요, 개헌 반대 세력 억압 등을 포함해 개헌 투표 결과를 조작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독일 언론들은 러시아의 개헌 투표 결과에 대해서, 억압과 조작이 공공연해진 러시아의 정치는 더 이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개정 내용에는 푸틴의 종신 집권 내용뿐 아니라 애국심 교육과 같은 극우주의적 내용들이 포함돼 있으며, 러시아 영토의 불가분성과 관련된 규정들은 독일 및 유럽연합(EU)과 지정학적 충돌을 야기시킬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고 우려 섞인 비판을 쏟아냈다.

다시 개헌 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푸틴 임기 연장과 관련한 조항이 포함된 개정안은 2020년 1월 20일 국가두마에 제출돼 세 번의 독회를 거쳐 3월 11일 가결됐다. 이어 3월 13일에는 85개 연방주체 의회에서 3분의 2의 동의를 확보했고, 3월 14일 푸틴이 개헌에 관한 법안에 서명했다. 3월 14일 헌법재판소는 헌법 개정안에 대한 합헌 여부 검토 요청을 받고 이틀 만에 검토를 마친 다음, 재판관 15명 중 14명의 찬성으로 합헌 결정을 내놓았다. 푸틴 정부는 3월 16일 헌법재판소의 개헌안에 대한 합헌 결정을 확보하고 4월 22일 전 러시아 투표를 계획했으나 코로나 19 사태로 투표일이 7월 1일로 연기됐다.

그러나 실제 투표는 코로나 19 방역을 이유로 6월 25일 사전 투표를 시작으로 7월 1일에 마무리됐다. 푸틴은 6월 1일, 23일, 30일 등 같은 달에 연이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러시아 애국주의와 전통을 강조하면서 이번 개헌 투표가 러시아의 국가적 가치 보존과 발전의 측면에서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면서 국민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헌법 개정을 위한 전 러시아 투표가 마무리된 다음날인 7월 2일 중앙선거위원회에서 최종 결과를 확정 발표했다. 그 다음날 푸틴 대통령이 관련 대통령령에 서명하고 이를 공포함에 따라 개정 헌법은 7월 4일 발효됐다.

개헌 찬반 투표와 관련해 외신은 푸틴 정부가 정식 국민투표도 아닌 새로운 절차를 고안해 최소 투표율에 대한 기준도 없이 여러 날에 걸쳐 진행하고 현장 투표 및 전자 투표와의 중복 투표도 가능할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되는 문제를 지적하며 이러한 임의적인 투표 방식은 푸틴이 정식 국민투표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알렉세이 나발니의 비판을 인용 보도했다. 또한 EU 대외관계 담당 대변인은 러시아가 개헌 투표 과정에서 발생한 투표 강요, 중복 투표, 비밀투표 원칙 훼손, 감시 역할을 수행하는 기자들에 대한 경찰의 무력 사용 등과 관련해 접수된 신고들에 대한 조사를 기대한다면서 투표 전에 개헌 반대 캠페인은 허용되지 않아 유권자들에게 균형 있는 정보접근권이 박탈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우여곡절 끝에 발효된 개정 헌법은 133개 조항 가운데 46개 조항에 수정이 가해져 있다. 수정된 주요 조항은 △대통령 임기 및 권력구조 변화 △대외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개정 △보수주의 가치와 애국주의 명시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대통령 임기 및 입후보 자격 관련 개정 조항은 푸틴 이후에는 2회 이상 연임하는 대통령의 출현을 차단하는 한편, 푸틴의 2024년 현재의 임기 종료 후에도 최대 2번 더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특히 대통령 출마자격과 관련해 외국 시민권이나 체류 허가를 받았거나 가진 사람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는 신설 조항은 외국 유학을 위해 학생 체류 비자를 받았던 경우까지 모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의 장관 임명권과 관련해서는 기존 헌법의 경우 장관 임명에 있어 대통령은 총리의 제안을 받아 임명했는데, 개정 헌법은 중앙 부처 및 정보기관을 대통령 지휘 기관과 경제·사회 부처라는 2개의 카테고리로 나눠 임명 절차를 달리 했다. 다시 말해서 정보 기관장과 부처 장관 임명 시 대통령이 상원과 협의하에 임명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나 협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절차이기 때문에 실제 대통령이 임명의 전권을 가지게 됐다. 기존에 있던 총리의 제안이라는 절차는 삭제됐다.

대통령의 사법부에 대한 권한 강화 부분에서도 개헌을 통해 헌법재판소장과 대법원장의 해임을 사실상 대통령이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이 확보돼 대통령의 사법부 지배 권한이 한층 강화됐다.

개정 헌법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 특권의 박탈 절차를 현직 대통령과 동일하도록 개정했다. 이는 향후 푸틴 체제가 약화되고 러시아 정국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대외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정 부분은, 국제법 우위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조항과 외국과의 영토협상 불가 원칙을 명시한 조항이 대표적이다. 푸틴은 개헌 구상을 처음 밝힌 당시부터 국제조약과 헌법과의 관계에 대해서 러시아 헌법에 배치되는 국제조약 등의 국제 문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결국 헌법에 배치되는 어떤 조약이라도 체결돼서는 안되며, 기체결된 조약에서 위헌 요소가 발견되면 러시아 내에서 그것은 적용받지 않을 것이라는 푸틴의 입장이 개정된 헌법 조문에 그대로 반영됐다.

이 개정 부분과 관련해 러시아 내 인권단체들과 유럽 측의 반응은 민감했다. 유럽의회 측으로부터는, 러시아가 유럽평의회 회원국으로 유럽인권조약에 비준한 상황에서 조약 46항의 유럽인권재판소 결정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계속 나왔다.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와 관련한 영토 관련 신설 조항도 논란이 됐다. 67조 러시아연방의 영토 관련 조항들 중 신설조항을 살펴보면, 러시아연방은 자국의 주권과 영토적 통일성을 보호하며 이웃국가와 러시아연방의 국경 구획, 경계 설정, 재설정을 제외하고 러시아연방 영토의 일부를 분리하는 행위와 그러한 행위의 조장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추가됐다. 푸틴은 영토에 관한 신설 조항을 콘크리트와 같은 개헌 조문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2014년 우크라이나로부터 병합한 크림반도 등의 재반환 협상은 있을 수 없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개정 헌법은 개헌 논의 단계에서부터 푸틴의 개헌실무그룹에 의해 러시아적 가치에 대한 담론들이 많이 도출됐는데, 특히 67조에는 러시아의 보수주의 가치와 애국심에 관한 다양한 메시지가 명시돼 있거나 내재돼 있다. 이것은 많은 논쟁거리와 어두운 전망을 양산했다.

서방세계는 수정된 조항들의 해석과 파급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보고 있다. 2020년 러시아 개헌의 여파는 △푸틴 체제의 권위주의 심화 △서방과의 관계 단절 및 중국 의존도 심화 △러시아 사회의 정체성 심화라는 전망이 현실화되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푸틴 집권이 장기화 될수록 또한 푸틴의 신념이 반석(盤石)화 될수록 국민들의 피로감과 경제성과에 대한 불만의 증대, 지정학적 리스크의 증대와 그에 따른 서방의 대러 제재 심화는 국민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푸틴은 또 다시 국정 운영에 필요한 추진 동력 강화와 국민으로부터의 지지율 제고, 측근의 이탈 방지 및 재정비, 근외정책, 애국주의 고취 등에서 더욱 고삐를 조일 것으로 보인다.

[다음 편에 계속]

이우탁 편집국장 newswatch@newswat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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