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가 2013년 2억5000만원을 들여 경포호 산책로에 설치한 박신-홍장 이야기 조형물. /사진=인터넷커뮤니티
강릉시가 2013년 2억5000만원을 들여 경포호 산책로에 설치한 박신-홍장 이야기 조형물. /사진=인터넷커뮤니티

2년 전, 그리고 올해도 강릉 경포호를 찾았다. 코로나19 때문인지 경포호 산책로엔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한적한 가운데 조형물이 우리를 반긴다.

강릉시 저동 경포호 산책로를 걷다 보면 일견 귀엽고 앙증맞은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강릉시에서 2013년 2억5000만원을 들여 설치한 이 조형물은 경포호가 배경인 설화 홍장고사(紅粧故事)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홍장고사를 기본 내용으로 제작·설치한 경포호 산책로의 조형물은 ‘유부남의 불륜 애정행각’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다. 

출전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전해지는 홍장고사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고려 우왕 때 박신은 백성을 잘 다스려 명성이 있었다. 강원도 안렴사가 되어 강릉에 가서 기생 홍장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강릉부사 조운흘이 박신을 놀리려고 거짓으로 “홍장은 이미 죽었다”고 하니 박신은 매우 슬퍼하였는데, 어느 날 조운흘이 박신을 초청하여 경포호에서 밤 뱃놀이를 하자고 했다. (중략) 안개 낀 밤 호수의 분위기를 이용하여 홍장이 탄 배가 마치 신선들의 놀잇배인 양 보이도록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박신을 속여 놀래켜 주고자 한 것이다.

박신은 다가오는 배에 타고 있는 홍장의 모습을 보고 정말 죽은 홍장이 신선이 되어 다시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여겨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잠시 후, 박신은 눈앞에 있는 홍장이 신선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한 바로 그 홍장임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자신이 조운흘에게 속임을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야기의 배경이 경포호라지만 현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조형물을 만들어 유명 관광지에 전시한 이유를 모르겠다.

조형물은 통상 제작이나 전시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박신-홍장 조형물 전시는 그 목적을 알 수 없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해학적’이라고 안내문에 나와 있는데, 그 내용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조형물의 안내문을 읽고 나면 당황스럽다. 이 조형물을 보고 뭐 어쩌란 말인가? 21세기 어법으로 말한다면 ‘중앙에서 파견 나간 유부남 공무원이 근무지에서 한 여성에게 빠져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내용인 것을….

강릉시에서는 옛 문헌에 나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거라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문헌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게 틀림없다.

강릉시 관계자는 “2013년 시에서 계획을 수립하고 입찰에 부쳐 사업비 2억5000만원으로 조형물을 설치했다”며 “이 조형물이 특별히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강릉시는 일부다처 남성 중심의 폐습이 주 테마인 설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제작한 조형물을 관광지에 전시함으로써 전국적인 웃음거리가 돼 버렸다.

박신의 행위를 비판했던 다산 정약용이 살아 돌아온다면 목민심서 내용을 바꿀지도 모르겠다. 박신-홍장의 조형물을 제작‧전시한 공무원을 질책하는 내용을 넣으려 하지 않을까 싶다. 

목민심서는 잘 아는 바와 같이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책이다. 설화 속 주인공 박신(1362~1444)은 고려말 조선초 정치가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박신과 홍장의 사랑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목민관 박신을 ‘몸가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수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생각컨대 박 안찰사는 물론 허황하고 혼미한 사람이요, 조공(趙公)도 꾸며서 상관을 놀려준 것은 역시 잘못이다. 내가 서읍에 있을 때에 이와 같은 일을 만났는데, 기생으로 하여금 앓아누운 체하여 모시고 놀지 못하게 하고, 놀이가 파하자 사실대로 말하니, 감사도 역시 사과할 뿐 나에게 노여워하지 않았다.’

왕조시대 폐습이 반영돼 있는 설화를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수용해 향유한다면 비난 받을 일이다. 그래서 설화를 받아들일 때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고려하고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해석해 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강릉시청 홈페이지 의견마당에 올라온 '박신-홍장 조형물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글.
강릉시청 홈페이지 의견마당에 올라온 '박신-홍장 조형물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글.

지난 5월 강릉시청 홈페이지 의견마당에는 ‘경포호수 홍장고사 기념조형물 및 설화전승에 대한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라왔다. 

‘경포호 산책로 조형물은 설화의 본질적인 요소를 간과한 채 어쭙잖은 사랑타령으로 변질돼 있다’며 ‘설화에 담긴 본질적인 가치 측면에서 재고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강릉 경포호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다. 조형물 설치 이후 수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다녀갔고, 오늘도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관광객들은 이 조형물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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