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구마모토 농장 직원 사택 네이버 블로그 인용.
1939년 구마모토 농장 직원 사택 네이버 블로그 인용.

[뉴스워치= 칼럼]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간 군산은 일본식 가옥과 서구식 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세관, 은행 등과 같은 건축물 여러 채가 그대로 보존돼 있어 일제 강점기 군산항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했습니다. 여느 일본의 지방 도시와 다르지 않은 거리 풍광이었습니다.

군산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저에게 일본식 2층 목조주택인 ‘히로쓰(広津) 가옥’을 가보셨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제가 모르는 일본의 건축양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군산에 살던 미곡상인으로 부를 축적한 히로츠킨 사부로(広津吉三郎)가 지은 가옥의 이름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더라고요.

그런데 히로츠킨의 집보다 제 눈을 더 사로잡은 건 동국사(東國寺)였습니다. 이 사찰은 한국의 전통 사찰과 달리 처마에 장식이나 단청이 없고 외벽에 창문이 많은 사찰이었는데,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이라고 하네요. 이 밖에도 군산에는 해망굴 근처에 신사(神社), ‘경정유곽’(京町遊廓, 현재 명산시장)의 터 등도 아직 남아 있는데 ,그만큼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는 의미일 겁니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지배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닌 서해안의 도시 군산. 금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은 고장으로 교통의 요지이긴 했지만, 조선시대까지 서해안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1899년에 개항 이후 군산은 제물포, 목포와 함께 ‘서해 3대 항구도시’로 성장합니다. 너른 평야를 끼고 있고 호남의 대도시 전주와 가까워 조선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에 최적의 항구였기 때문입니다. 쌀을 사기 위해 군산으로 몰려든 일본인을 위해 쌀을 쌓아놓던 창고들이 지금은 복고풍인 카페로 변신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제는 초기부터 식량 산지로 조선을 주목했는데, 1908년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전주와 군산을 잇는 ‘최초의 신작로’, 전군가도,(全群街道)를 개통합니다. 이어서 서울에서 목포를 오가는 국도 1번, 목포에서 부산을 오가는 국도 2번을 개통하였는데, 이는 호남에서 징발된 쌀을 서울과 일본으로 운송하기 위함이지 결코 조선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닌 거죠.

일제 강점기, 군산에는 1200여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를 소유하며 3000여 가구의 소작농을 두었던 일본의 대지주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 1879-1968)가 있었습니다. 그는 쌀 공출과 농지 관리를 도맡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는데, 1931년 무렵에는 식민지 조선을 통틀어 일곱 번째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구마모토가 원래부터 부자였던 건 아닙니다.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지금의 게이오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의 전력왕’ 마츠나가 야스자에몬(松永安左衛門)이 경영하던 고베(神戶) 후쿠마츠상회(福松商會)에 입사한 그는 1901년부터 조선을 왕래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1903년 조선의 농장경영 가능성을 발견한 구마모토는 오사카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에 이에 관한 글을 기고하는데 이 글이 『마이니치신문』 사장, 모도야마 히코이치(本山彦一)의 눈에 띄어 땅을 매입할 자금 3000엔을 지원받습니다.

당시는 아직 한일 강제병합이 이루어지기 전으로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투자였음에도 구마모토는 군산에 대규모의 땅을 사들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4살이었습니다. 당시 벼락부자를 꿈꾸며 조선 땅을 밟은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을 시행한 조선총독부는 소유 관계가 불명확한 토지를 강제로 수용했는데, 토지 브로커로 총독부에 줄을 대며 구마모토는 1910년 말 소유한 땅을 1500정보로 늘립니다. 7년 만에 소유 토지가 3배로 늘어난 셈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물가 폭등으로 일본에서는 1918년 8월 ‘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부족을 쌀을 메꾸기 위해 수탈 항으로서 군산항을 이용하면서 1930년대는 1년에 900척의 배가 입항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국제무역항으로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군산에 세관만이 아니라 조선의 금융 지배를 목적으로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일본 제18은행이 설립됐는데, 은행은 지금 미술관으로 변신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군산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경제체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인들이 먹어야 할 쌀들이 일본으로 수탈되면 될수록 군산은 번창했고 구마모토 또한 부자가 되어갔습니다. 군산의 땅들을 끌어모아 엄청난 지주가 된 구마모토는 해마다 소작료로만 1만2000석 이상을 거둬들였다고 하니 얼마나 돈을 끌어모았는지 상상이 되시겠죠?

그는 1937년에는 '주식회사 구마모토 농장'을 세웠지만, 이 농장은 패전과 함께 몰수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가 천수를 누린 구마모토 상은 조선에서 삶을 행복하게 반추하겠죠?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이화여자대학 졸업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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