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얼마 전 후배와 통화를 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정년 이후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후배는 그간 돈도 어느 정도 벌었을 테니 이젠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거 살살하며 사는 삶을 추천했다. 그 말을 듣고 '과연 그게 가능할까? 도대체 내 둥지 안에 달걀은 몇 개나 있을까' 궁금해서 한번 세어보았다. 그랬더니 유감스럽게도 내 달걀 둥지는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였다.

가계순저축률이란 개념이 있는데 이는 개인이 처분할 수 있는 소득, 즉 가처분소득에 대한 순 저축의 비율이 얼마인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개인이 처분할 수 있는 모든 소득 가운데 소비하고 남은 금액의 비율로, 가계순저축률 숫자가 낮으면 소득에서 소비를 더 많이 하고 가계순저축률이 높으면 높을수록 저축을 많이 한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경기가 어려우면 낮아지고 호황이면 높아지는데, 불행히도 난 그동안 저축을 거의 하지 못하고 살아온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 가계순저축률의 변화를 살펴보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1998년 가계순저축률이 23%나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아 국가부도에 직면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용 교과서에 국민의 과소비가 외환위기를 불러왔다고 적혀있었는데 사실 국민은 열심히 저축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외환위기의 주범은 대기업 중심의 국가 경제체제로 무분별한 대출과 투기적 금융세력의 농간에 놀아난 우리 정부의 무능이었다. 그 후 경기침체가 계속되어 가계순저축률은 2002년 1.5%까지 급락해 이에 대한 통계를 시작한 1975년 이후 최저수준을 기록하였다. 올해의 가계순저축률은 9.1%라고 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촉발된 유례없는 경제 변화와 글로벌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거쳐오면서 전 세계의 가계는 어두운 그림자에 휩싸이게 되었다. 재정 건전성을 나타내는 핵심 지표인 가계순저축률은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감소해 왔으며, 이는 평균 가족의 미래를 위한 저축 능력에 대한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금융 안전망, 투자, 경제적 안정에 있어 개인 저축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감소는 더욱 문제가 될 수 있다.

순저축률이 감소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원인은 생활비 상승이다. 주택 및 의료부터 교육 및 일상 비용에 이르기까지 필수품과 관련한 가격의 상승폭은 대다수 가구의 소득 증가를 능가했다. 가족들이 증가하는 생활비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저축할 수 있는 여유가 줄어들고 탄탄한 재정적 완충 장치를 구축할 여지가 거의 남지 않았다.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문화의 확산도 저축의 쇠퇴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신용 소비로 보다 쉬워진 고가품에 대한 접근과 최신 기기 및 경험에 대한 욕구로 인해 소비자 중심주의가 부상하면서 많은 사람이 장기적인 재무 계획보다 즉각적인 소비를 우선시하게 되었다. 전철을 타면 금방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손에는 값비싼 최신 스마트폰이 들려있고 명품가방을 품에 안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 당장 품위 유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우리의 소비문화가 한눈에 들어 온다.

더욱이 정체된 임금 상승과 비정규직, 시간제 고용은 순저축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직업 안정성이 종종 위협받는 현실 경제에서 개인은 장기적인 저축 목표보다 단기적인 재정적 필요를 우선시할 수 있다. 게다가 고용주가 후원하는 퇴직 계획 및 기타 혜택이 없으므로 견고한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가계순저축 감소는 단지 개인 재정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경제 전체에 더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저축이 제한된 인구는 경기침체에 직면했을 때 회복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구는 실직이나 의료 응급 상황과 같은 예상치 못한 충격에 더 취약하게 된다. 이러한 재정적 준비 부족은 경제 위기의 영향을 증폭시키고 사회 안전망에 부담을 줄 수 있다.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재정의 불안과 대기업 중심의 경기회복은 여전히 경제회복이라는 희소식을 남의 일로만 보이게 만든다. 일반 국민의 소득이 증가하여야 한다. 직업 안정성을 강화하고 금융 이해력을 증진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시행되어야 한다. 고용주는 장기적인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은퇴 계획을 포함한 포괄적인 혜택 패키지를 제공하여야 한다. 건전한 소비문화와 책임 있는 금융습관을 향한 문화적 변화를 촉진하고 교육 및 미디어에서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빈약한 내 둥지 안의 달걀에 노후를 의지할 수는 없을 거 같다.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 약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화학 박사학위 취득

서울시 영등포구청 인권위원회 위원

사)서울시 아동공공생활 지원센터 운영위원

현)동덕여자대학교 교양 대학교수

현)뉴스워치 편집위원

<신오쿠보 뉴커머 코리아타운과 이중의 정체성>, <일본의 다문화공생제도와 한국의 다문화정책> 등 다수 논문과 <화투-꽃들의전쟁>, <다원문화사회의 담론> 등 저역서 다수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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