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마(精霊馬) 오이와 정령우(精霊牛) 가지. 사진=일본방송 RKK
정령마(精霊馬) 오이와 정령우(精霊牛) 가지. 사진=일본방송 RKK

[뉴스워치= 칼럼]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예로부터 추석은 조상님의 은덕으로 풍성한 수확을 걷게 된 것에 감사하는 명절이었지만, 요즘은 추석과 설 중 한 번만 지내거나 아예 안 지내는 분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니다. SNS, TV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보고 있노라면 추석 연휴 때 해외로 떠나는 이들의 이야기로 넘쳐나 '이거 나만 방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는 거 아냐?'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반 정도 그 중에서도 직장인의 경우 10명 중 8명은 추석 연휴 때 고향을 방문할 계획이라 하니 아직 추석의 전통이 사라진 건 아닌가 봅니다.

일본에도 추석과 비슷한 명절이 있습니다. 음력 7월 15일 우라분에(盂蘭盆会)라는 불교 행사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우라봉에'를 줄인 오봉(お盆)이 바로 일본의 추석입니다. 한국 불교에서 죽은 이를 위한 천도재를 올리는 날인 우라분에(盂蘭盆会)는 석가모니의 상수제자인 목건련이 지나친 자식 사랑으로 자식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은 죄로 아귀도(餓鬼道)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공양을 올려 어머니를 극락왕생시켰다는 일화에서 유래합니다.

일본은 주로 납골당이 아닌 집 가까운 가족 묘지에 모십니다. 가족 묘지는 무덤이 아닌 화장한 유골을 넣는 곳으로 오봉(お盆)이나 설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의 성묘처럼 가족묘비를 청소하고 꽃을 꽂아두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상님을 위해 상차림도 합니다. 하지만 오봉이 우리의 추석과 좀 다른 건 '차례'라는 인식보다는 여름 축제 같은 분위기가 강하다는 겁니다. 오봉이 우라분에(盂蘭盆会)라는 불교 행사에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일본 전통의 여름 축제와 합쳐져서 만들어진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양력이 도입되기 이전의 오봉은 음력 7월 15일이었는데, 1873년부터 8월 15일로 정해졌습니다. 8월 15일이 아이러니하게도 마침 패전일이다 보니 전쟁으로 죽은 가족을 기리는 날처럼 인식되기도 합니다. 오봉과 설날 모두 죽은 분의 영혼을 맞이하는 행사이지만, 불교적 의미가 강한 쪽이 오봉이고 일본 전통 종교인 신사 제례로서의 의미가 강한 쪽이 설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석 준비를 위해 추석 전날부터 연휴가 시작되듯 오봉 연휴는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나흘간으로 설과 달리 엄청난 귀성행렬을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고향에 내려가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오봉 연휴 첫날인 13일은 조상이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집 현관이나 산소에 향과 불을 피워둡니다. 이를 죽은 이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한 '무카에비(迎え火)'라고 합니다. 다음날인 14일에는 다니는 절의 스님을 불러 집으로 돌아온 조상(죽은 이)을 위한 제를 올립니다. 특히나 사십구재가 끝나고 처음 맞이하는 오봉에는 거의 제사처럼 검은색이나 곤색 복장으로 친지들을 맞이합니다.

상차림은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망자의 위패를 모신 정령선반(精霊棚)에 고기 대신 두부나 야채 등을 사용한 정진요리(精進料理), 소면, 조(粟), 과일, 떡 등 간단히 준비하여 올리기 때문에 우리처럼 따로 명절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떡은 제주의 오메기떡처럼 팥을 밖으로 묻힌 오하기(おはぎ)를 올리는데, 붉은색은 악한 기운을 없애는 색이고 콩 또한 액막이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동지나 생일날에 팥을 사용하는 건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특이한 건 가지와 오이에 대나무 꼬치나 나무젓가락 4개를 꽂아 다리를 만들어 상에 올리는 겁니다. 오이는 정령마(精霊馬), 가지는 정령우(精霊牛)로 조상(망자)의 영혼을 태우고 저승에서 후손들이 사는 집까지 빠르게 태워다주는 탈것인 셈입니다. 오봉 날에는 선반에 올리지만, 그전에는 현관에 놓아둡니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불을 피우거나 미리 뭔가를 준비하는 것이 어려우니, 이런 복잡한 것은 다 생략하고 오이와 가지 장식만 사서 장식하는 집들도 많습니다. 오봉 때가 되면 오이와 가지 모양에 다리를 단 장식물을 쉽게 마트에서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근데 왜 오이와 가지인지에 대한 정확한 설은 없지만, 8월에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수확되는 단무지를 만들 때 쓰는 친근한 야채라서 그럴 겁니다.

15일이나 16일에는 조상의 영혼을 떠나보냅니다. 지역이 바닷가면 15일 밤, 폭죽과 종을 치며 돌아가신 분의 영을 정령선(精霊船)에 태워 서방정토에 보내는 행사를 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여름의 풍물로 여기는 밑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打ち上げ花火)는 원래 오봉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농촌을 떠난 사람들에게 가을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는 퇴색되었다고 하더라도 일 년에 한두 번만이라도 친척들의 얼굴을 반갑게 볼 수 있는 명절이길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무엇보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음식 준비며 집안일을 가족 모두가 기꺼이 분담하고 함께 준비하는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명절이 모두가 즐거워지고 반가워질 겁니다. 음식이 아닌 배려하는 마음, 서로의 안부와 응원을 나누는 아주 즐거운 명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이화여자대학 졸업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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