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 박서하
사진 촬영 박서하

[뉴스워치= 칼럼] 일본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 중 이카사레루(いかされる)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용하는 한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릅니다. 우선 ‘어떤 것의 장점을 잘 살리다’라는 의미의 동사, 이카수(活かす)의 수동태 이카사레루(活かされる)인 경우는 ‘장점이 잘 드러났다’ ‘장점을 잘 살렸다’ 등의 의미입니다. 한자를 활(活)이 아닌 생(生)을 쓰는 이카수(生かす)의 수동태, 이카사레루(生かされる)는 ‘∼가(  )를 살게 한다’ ‘살려 둔다’ ‘소생시키다’ 등의 단어인데, 현재 진행형 이카사렛데이루(生かされている)로 주로 사용합니다.

불교적 사고에 기인한 이 말은 일본인의 삶의 태도를 극명히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삶이 내 의지나 나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것들의 손길과 희생 덕분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매일 먹은 음식, 그것이 밥이든 나물이든 고기든 생선이든 원래는 생명이었을 것의 희생 위에 누군가의 손길이 더해져 내 입에 들어오는 것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드라마를 보다 보면 누군가 차려준 식사도 아닌 자기가 만든 걸 혼자 먹을 때도 이따다키마스(頂きます)라고 하는 장면을 자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식사를 할 때 주로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라는 말로 고생해서 식사를 차려주신 손길에 감사함을 표명합니다. 하지만 일본어의 이따다쿠(頂く・戴く:いただく)는 정확히 ‘이따다끼마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따다쿠는 ‘정수리 정(頂)’이나 ‘받들 대(戴)’로 표기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수리 정(頂く)을 사용합니다. 어쨌든 이 말은 누군가에 의해서 무엇인가(연락·물건·사랑·보살핌 등 추상적 감정)를 고개 숙여 머리 위에서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식사 시 이따다키마스는 음식을 만들어준 손길에, 그리고 원래 생명이었을 식자재에, 그런 식자재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준 물·햇볕·바람에, 조화로운 계절을 우리에게 선물한 신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일종의 의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상의 의식은 일본인의 의식 속에 ‘보이지 않은 많은 손길에 의해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니 이카사레루(生かされる)는 감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감사한 일에 의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을 장기화한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이야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견디며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하루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지만, 코로나로 등교도 외출도 여행도 어려워지면서 아이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조금이나마 그런 아이의 숨통이 트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시로 자전거를 타고 공원이나 동네를 돌고, 필요 없는 물건을 사러 나가고, 집을 엄청나게 어질러가며 뭔가를 만들어보기도 하면서 그 시간을 견뎠습니다. 이제 코로나 사태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지금, 아이를 위해 그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난 어디에도 나가지도 않고 집에서 OTT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글만 쓰고 지냈을 겁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고생했던 안 좋은 기억보다 자전거를 타며 아이와 함께 본 풍경, 함께 들은 음악, 지나가다 들은 카페에서 먹은 맛난 음식들을 더 많이 기억해낼 겁니다. 몸이 힘들었지만, 아이 덕분에 아주 건강하게 소중한 추억을 쌓으며 그 시기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2006년 미국의 전설적인 흑인 기업가 크리스 가드너의 실화를 그린 윌 스미스 주연의 ‘행복을 찾아서’에서, 아내가 집을 나가고 길거리로 나앉는 신세로 전락한 가드너에게 아들 크리스토퍼는 그의 삶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지만, 또한 그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들로 인해 이카사렛테이루(生かされている) 하는 걸 겁니다. 나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그런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 의식되지 않아도, 우리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일 겁니다. 틀림없이.

■ 프로필

이화여자대학 졸업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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