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와카루와 시루./사진=http://verbhandbook.ninjal.ac.jp 인용
그림 와카루와 시루./사진=http://verbhandbook.ninjal.ac.jp 인용

[뉴스워치= 칼럼] 급작스러운 기온상승으로 벌써 여름이 왔나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아직은 여름이 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합니다. 3일간의 황금연휴가 2번이나 있었지만, 캠핑이다 해외여행이다 하는 건 전부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립니다. 시간이 여름날 뭉게구름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연휴, 저는 밀린 숙제처럼 보고 싶었던 몇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그중 반짝이던 브래드 피트의 황금기 시절을 볼 수 있었던 1993년작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을 인상 깊게 봤습니다.

노먼 매클린의 동명 소설 원작의 ‘흐르는 강물처럼’은 엄격하지만 자상한 목사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아버지를 닮아 모범적인 큰아들 노먼, 도전적이고 자유분방한 작은 아들 폴, 이렇게 4가족은 몬태나주 강가의 교회에 살고 있습니다. 큰아들과 달리 자유분방하고 위험천만한 생활을 즐기던 폴은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고자 합니다. 아버지가 가르쳐주는 낚시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물에 뛰어 들어가 대어를 낚기도 하는 그의 도전적 삶은 매력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지역신문 기자가 되어 열정적 삶을 즐기던 폴은 도박장에서 포커를 즐기고 집으로 가던 중 길에서 폭행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과 아들을 돕지 못했다는 좌절에 깊은 고뇌에 빠진 아버지는 아름다운 폴을 기억하며 폴을 위한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에 처한 걸 보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기꺼이 돕겠습니다. 주님!”

하지만 폴의 아버지도 그의 형도 그의 친구들도 폴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떠올리며 “서로 이해 못 하는 사람과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린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는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가끔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으면 잘 이해할 수 있는 걸까요?

일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일입니다. 제 지도교수는 술만 마시면 농담처럼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에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 있는지 자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상대방에게 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은연중에 그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많이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좋아하게 된다고 말이죠. 실제로는 이런 방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TMI로 이미지만 나빠질 수 있으니 굳이 참고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누가 어떤 사람을 보고 ‘나 저 사람 알아’라고 하면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는 의미인지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서 ‘알다’는 사물(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갖고 있거나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감각적으로 느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말하면 ‘알다’는 지식으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모든 것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일본어로 정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은 ‘시루(知る,しる, know)’이지만, 이해하다는 ‘와카루(わかる, understand)’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와카루(わかる)도 이해하다(解る), 판단하다(判る), 분별력 있다(分る) 등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구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판결문이나 조례 등이 아닌 경우에는 이해하는데 굳이 어떤 근거로 이해하는지 밝혀야 이해되는 건 아니므로 일반적으로는 히라가나로 와카루(わかる)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오롯하게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과연 온전히 사랑한다는 건 무엇일까 라는 물음에 일본어는 시루(知る)와 와카루(わかる)가 다르다는 것을 통해 아는 것이 곧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많이 아는 것이 거꾸로 편견의 세상을 만드는지 모릅니다. 내가 아는 지식이나 정보로 상대방을 보지 말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하겠다는 마음으로 보면 아는 사람이 아닌 이해하는(와카루, わかる)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념과 세대갈등으로 얼룩져버린 세상 속에서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는 완전히 사랑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완전히는 아니어도 조금은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편견 없이 뭐라고 하는지라도 들어봅시다.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이화여자대학 졸업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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