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6·25 전쟁 초반인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 제7기병연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한동안 묻혀있다가 1999년 AP통신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마을에 소개 명령이 떨어지자 주곡리 마을 주민들은 영동읍 임계리로 피난하게 되고, 25일 저녁 주곡리·임계리 등 지역 주민 500~600명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게 된다.

26일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를 변경해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됐다. 피난민은 미군의 공격을 피해 노근리에 있는 개근 철교(쌍굴) 밑으로 피신했고, 미 육군은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쌍굴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을 향해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을 했다.

한국인 피해자 중 사망, 부상 또는 실종된 인원이 248명이라고 했다. 2000년 1월 미국 측은 육군장관과 민간전문가들을 포함한 자문위원단이 내한해 사건 개요 및 조사상황을 청취한 뒤 충청북도 영동의 사건 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증언과 요구사항을 들은 바 있다.

현재 노근리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서송원천 위로는 경부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영동역과 황간역 사이에 있는 사건 현장인 개근 철교에는 여전히 총탄 자국 수백 개가 남아있다. 철교 건너편에는 노근리 역사공원과 노근리 평화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1999년 이 사건을 조명한 AP 취재팀은 2000년 탐사 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 때문에 발발된 6·25전쟁은 수많은 양민의 희생을 불러왔다. 북한군은 전남에서만 4만3511명, 전북 5603명, 충남 3680명 등의 양민을 학살했으며 남한 내 좌익들에 의해서도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1952년 발간된 대한민국통계연감에 의하면 이들에 의해 총 12만2799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전쟁은 양민의 목숨을 쉽게 가져갈 수 있다. 따라서 양민의 학살은 가장 큰 전쟁범죄의 하나로 거론된다. 남한군에 의해서도 수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에 의해서도 양민은 목숨을 잃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노근리 학살이다. 당시 남한은 너무나 힘이 없었고 국민을 지켜줄 능력이 없었다.

1950년 5월 30일 한국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후 2년만에 치러진 이 총선에서 무소속이 총 210석 중 126석을 얻었다. 보수 야당인 신익희의 민주국민당(24석)이 제1당을 차지했고 여당 대한국민당(24석)을 비롯한 친 이승만파는 5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정치는 국민의 외면을 받았고 국력은 미약했으며 국제사회는 한국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개최된 바로 다음 날 새벽, 남한은 북한의 침공을 받았고 힘없는 자의 죽음의 행렬은 시작됐다.

세월이 흘러 지난 21일까지 열린 G7 정상회의에 한국은 초청국으로 참가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G7은 선진 7개국 정상회담으로 냉전기 서방을 대표하는 7개 강대국이자 경제 선진국이었던 나라의 정상들이 모여 국제사회의 현안에 대해 연례 회의를 하는 국가 간 협의체이다.

1973년 비정기 회의 당시에는 G5로서 미국·일본·서독·영국·프랑스 5개국이 가맹됐고, 이후 이탈리아가 1975년, 캐나다가 1976년에 각각 추가됐다. 1997년 러시아가 가맹해 가맹국이 8개로 늘면서 명칭이 잠시 G8으로 바뀌었으나, 2014년 러시아가 불법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G8에서 퇴출당해 다시 G7이 됐다.

한국은 기존 G7 가입국들과 비교할 때 호주와 더불어 그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나라로 평가받고 있으나 아직은 미가입국이다. 한국이 주요한 의제들이 논의되는 현장에 참석해 의견을 제시하고 있음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한국은 세계사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노근리의 참변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미군은 그들을 북한 침입자로 오인해 수많은 남한 민간인을 살해했다. 사건 이후 미군 사령부는 애초 노근리 민간인 사망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생존자와 목격자들이 증언했고 언론인 등을 통해 그 참상이 밝혀졌다. 2001년 한국 정부는 노근리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1950년의 노근리 학살은 전쟁의 공포와 무고한 민간인이 십자포화에 휘말렸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참혹한 결과를 상기시키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또한, 국제사회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혼란에 휩싸인 약소국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존재인지를 일깨워 주는 사건이었다.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 약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화학 박사학위 취득

서울시 영등포구청 인권위원회 위원

사)서울시 아동공공생활 지원센터 운영위원

현)동덕여자대학교 교양 대학교수

현)뉴스워치 편집위원

<신오쿠보 뉴커머 코리아타운과 이중의 정체성>, <일본의 다문화공생제도와 한국의 다문화정책> 등 다수 논문과 <화투-꽃들의전쟁>, <다원문화사회의 담론> 등 저역서 다수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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