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누구의 인생에나 신이 머물다간 순간이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질 때, 누군가 세상 쪽으로 등 떠밀어준다면. 그건 신이 당신 곁에 머물다 간 순간이다.”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이 대사는 빔 벤더스의 1987년 작, ‘베를린 천사의 시’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영화의 원제는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über Berlin)」이지만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베를린 천사의 시(,ベルリン・天使の詩)’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습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삶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지치고 슬픈 사람들. 지하철에 앉아있던 중년 남자는 “너는 실패했어, 실패는 앞으로도 오래 계속될 거야. 부모는 너를 내치고, 아내는 배신했고, 친구는 다른 도시에 있고, 아이들은 너의 말실수만 기억하고, 너는 거울 앞에서 매번 너의 따귀를 때릴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되뇝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 천사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립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돌연 “스스로 떨어져 내렸다면 다시 나올 수도 있을 거야. 너를 그렇게 비하하지 말라는 어머니 말이 맞아”라며, 자기부정에서 벗어나 잘 해낼 거라는 희망을 끈을 발견합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나를 살게 하는 건 나를 위로하는 신의 손길이었다고 말해주는 장면이 참 좋았습니다.

실업, 가난, 실패, 노쇠한 육체 등으로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 마음속 어딘가들이 불쑥 ‘어떻게든 될 거야’‘그렇게 슬픔에만 빠져있지 마’라고 자신을 다독이는 마음이 들었다면 신이 나를 세상으로 떠밀어주는 순간일 겁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 고립된 인간들은 삶을 짓누르는 수많은 감정과 고통에 시달리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천사는 베를린의 도시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로이 이동하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아무런 고통도 위험도 없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천사는 그 어떤 향기도 색깔도 온기도 느낄 수 없는 무채색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천사 다미엘이 서커스와 인간의 삶에 매료되는 것도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모습이 인간의 삶처럼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천사, 다미엘은 “난 나의 무게를 느끼고 싶어. 나의 무한함을 집어 던지고 땅에 발 딛고 싶어. 영원이라는 말 대신, 바람에 부대낄 때마다 지금’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해”라고 말하며 초월적 존재를 포기합니다. 초월적 공간인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다미엘은 이마에 피가 나지만, 고통을 느끼고 붉은색의 피를 보는 것조차 아름다운 ‘지금’의 순간으로 즐깁니다. 그가 인간이 되어 가장하고 싶었던 일은 추위에 손을 비비고 뜨거운 커피를 마셔보는 일이었습니다. 따뜻한 차에 몸을 녹이고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에 마음 졸이는 것 또한 유한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죽음에 한 발을 담그고 사는 인간의 일상은 하찮습니다. 빔 벤더스는 무채색의 영원함이 아닌 욕망으로 고통받는 인간의 하찮은 일상에서 영원함(구원)을 발견합니다. 이런 빔 벤더스의 시선에서 그가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는 오즈야스지로(小津安二郞) 감독의 영향이 보입니다. 오즈의 영화에서 성스러운 ‘하레(晴れ)’는 세속의 일상 속 어느 순간에 잠시 머무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오즈의 영화에는 만남의 기쁨, 이별의 고통이 어우러진 일상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불안과 분노, 좌절감이 나를 그리고 우리를 잠식시켜 버리는 날에는 신이 내 어깨에 손 올려 세상 쪽으로 등 떠밀어주는 주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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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이화여자대학 졸업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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