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쿠모가미 일러스트(ac-illust.com)
츠쿠모가미 일러스트(ac-illust.com)

[뉴스워치=칼럼]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로 겨울옷 정리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이왕 시작한 거니 집안 곳곳에 잘 쓰지 않은 물건들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니 꽤 망설여집니다. 일상용품도 그렇지만 더 버리기 힘든 건 유행이 지난 캐릭터 인형들, 장난감들, 소품들입니다. ‘아, 이건 ○○에 놀러 갔을 때 산 거다’. ‘이건 한참 포켓몬에 빠져있을 때 산 인형인데’ 등 물건에도 오래된 노래처럼 추억이 소환됩니다. 그저 돈 주고 산 물건에 불과한 것들도 손때가 묻고, 추억이 더해지면 나의 소중한 기억을 버리는 것 같아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버리기가 주저됩니다. 더군다나 사람이나 동물의 모양을 한 인형들은 다른 물건과 똑같은 무생물인데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를 버리는 것 같은 죄책감까지 느껴집니다.

이런 마음은 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물건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책이나 그릇만이 아니라 팔다리가 없어지거나 얼굴이 뭉개진 중증인형환자들을 수술하여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는 인형병원까지 생겨났다고 하니 말이죠.

일본에서는 그 쓰임을 다한 물건들을 부처님이나 가미에 공양하는 ‘침공양(針供養, 하리구요우)’ 행사가 매해 2월 8일에 신사와 사찰에서 열립니다. 구부러지거나 녹 쓸어 쓸모없어진 바늘이나 칼, 가위, 못 등 쇠붙이를 그 영혼이라도 거둬가 달라고 부드러운 두부나 곤약에 꽂아서 공양합니다. 쇠붙이 이외에도 신발, 인형, 인쇄물, 젓가락, 장난감 등 일상용품을 공양합니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하나의 물건을 오래 사용하면 그 물건에 신이 머물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신의 이름은 ‘구십구신(九十九神)’, 일명 ‘츠쿠모가미(付喪神, つくもがみ)’입니다. 『이세이야기(伊勢物語)』에 백발의 노파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는 이 신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도 하고 물건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걸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그 물건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사용해야 신이 찾아온다고 하니 신을 불러오기 위해서라도 물건을 버리지 않고 오래 잘 사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의 물건을 대하는 자세는 다도(茶道)에서 금이 가거나 이 빠진 그릇을 고쳐 사용하는 킨츠기(金継ぎ)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수묵화의 여백의 미처럼 완벽하게 채우지 않은 것, 결핍된 것에서 느껴지는 충만함, 나아가 어떤 존재라도 그 생명이 다한다는 것을 깨져버린 그릇의 한 모서리를 보며 느끼는 겁니다. 세월은 모든 걸 퇴색시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쓸모없는 것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쓸모라는 기준을 좀 바꾼다면 많을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못생겼다, 유통기한이 지났다, 너무 많이 만들었다 등의 이유로 섭취 가능한데도 소비되지 못한 채 버려지는 음식이 생산된 식량의 40%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면 식품 손실(Food loss)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준비한 음식을 팔지 못하면 폐기해야 하고 그러려면 막대한 비용이 드는, 남는 음식을 소비자에게 매우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스타트업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소비자는 야식이 당기는 출출한 밤, 저렴하게 고급 식당의 음식을 먹을 기회가 생기고 식당은 음식 버리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니 완전 땡큐인 거죠. 또 어떤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는 마을 노인들이 버려지는 나뭇잎이나 꽃잎을 모아 요리장식으로 쓰일 수 있도록 상품화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흡수력과 방취성이 뛰어나 폐신문이 인터넷에서 인기리에 거래되고 있다고 합니다.

쓸모는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쓸모없다고 자신의 잣대로 남을 평가하지 말고 낡은 청바지가 가방으로도 인형으로도 변신할 수 있듯이 나 혹은 내 주변이 있는 것들의 쓸모는 내가 뭘 보고 싶은지에 따라 더 많은 쓰임이 생겨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진정 그 쓰임이 다했을 때는 공양하듯 감사히 보내줍시다. 그래야 그 물건, 혹은 사람, 그리고 그것들과 시간을 공유한 나의 추억도, 극락왕생할 테니 말이죠.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 이화여자대학 졸업

◇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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