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코로나로 굳게 닫혔던 하늘길이 열리면서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해외로 나가는 건 유학이나 해외 파견근무, 해외 친지 방문 등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허락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해외라는 건 매우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런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유학 절차를 밟아놓고도 공항에서 포기하고 돌아온 친구도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1990년대,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가 붕괴하였다고는 해도 여전히 경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명품을 사기 위해,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 단체관광을 위해 뉴욕, 파리, 로마, 하와이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와서 한결같이 “어딜 가나 일본만 한 곳이 없어”, “일본이 세계 최고로 안전해” 등의 말을 했습니다. 이런 “국뽕스러운 발언”이 적잖게 불편하면서, 그래서 ‘일본인들은 국가가 하는 일에 그다지 반발하지 않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금이야 부심 차오르게 K팝, K푸드, K컬쳐, K방역 등 뭐든 앞에 K를 붙여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있지만, 제가 어릴 때는 우리 자신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표면화된 것은 2002년 월드컵 이후라는 생각이 드는데,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어딘가 유치한 문구에 가슴이 뜨거워지던 그 기억이 “하면 된다.”를 강요당하던 군부정권의 슬로건을 긍정적으로 바꿔 놓았으니 2002년 월드컵은 참으로 소중한 기억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자신을 왜 냄비근성이니 후딱 하면 분열한다느니 하며 자기 비하를 했던 걸까요. 그런 자기비하적 사고관은 일제 강점기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하면서 당쟁만 일삼은 양반계층의 타락과 수구(守舊), 화폐경제의 미발달로 근대로의 이행 기미가 전혀 없는 ‘정체된 사회’로 조선을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발전 가능성이 없는 무능한 나라 조선을 근대화로 이끌기 위해 일본과의 합병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런 주장은 ‘탈아론’의 저자로 일본의 계몽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그는 『시사신보(時事新報)』(1884)에서 ‘일본의 국력으로 조선의 국사를 간섭하여 빠른 시일 내에 문명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음 해 1885년 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그 나라의 멸망을 경하한다(朝鮮人民のために其国の滅亡を賀す)’라는 「조선멸망론」을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이 과거에 멈춰있다는 정체론(停滯論)은 ‘후쿠자와 토쿠조(福田德三)’에 의해 구체화됩니다. 하지만 1900년 이후 일본은 조선을 야만으로 규정한 후쿠자와의 논리에서 벗어나 삼국시대까지는 번영된 국가였지만, 왕조의 부패로 고려 시대부터 퇴락하더니, 조선 시대에 와서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타락했다는 쪽으로 바꿉니다. 이건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同源』1919)의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낙후하고 부패한 조선을 좀 더 발전된 근대사회로 끌어내기 위해 조선합병이 불가피하다는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이죠. 이런 일본의 지배 논리는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층을 설득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조선을 일본이 구제하여 문명국가로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식민주의 사관은 패전 이후 사라지는 듯했지만,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에 의해 부활합니다. 그는 『언덕 위의 구름』(1968)에서 일제가 조선왕조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한 이왕조라는 용어를 써가며, 오백 년이나 지속하여온 질서의 노화로 조선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고 서술하며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이미지를 고착시킵니다. 이런 주장은 서구의 기술문화 수용을 절대적 가치를 둔 서구중심주의의 사고에 기인한 것으로 식민지지배를 미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자존감은 한 인간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자존감’은 「자신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으로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自己存在感, self-esteem)’의 준말입니다. 흔히,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마음 한편에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인 믿음이 깔려있으면서도 높은 의존성을 보이며 염세적이고 숙명적인 가치관을 갖기 쉽다고 합니다. 민족적 자존감이 낮아지면 자신을 비하하고 비굴해집니다.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를 보며 국뽕 차오르게 “대∼한∼민∼국”을 외치고, 평소라면 좀 낯뜨겁게 느껴지던 K가 붙은 모든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 이화여자대학 졸업

◇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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