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 다음 주 일요일이 구정이다. 올해는 이렇게 구정이 일찍 다가오니 저절로 마음도 바빠짐을 느낀다. 예전엔 구정이면 일가친척이 다 모여 제사도 지내고 온종일 웃고 떠들다 대개 마지막엔 화투를 쳤다. 이때 우리는 화투를 친다고 표현한다. 화투를 한다는 말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어찌 되었든 화투는 왜색이 짙다고 하여 비난도 받았고 종종 노름으로 변질하여 또 언론에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손쉽게 참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엔 가장 적당한 놀이도구 중 하나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화투는 12종류 48장으로 되어 있는 딱지 모습을 띠고 있다. 일본의 카드놀이인 ‘하나후다(花札)’가 조선 시대 후기에 한반도로 전해져 변형된 것이며, 이것을 처음 누가 전파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한국에 들어온 후 급속히 전파되어 가장 대중적인 놀이의 도구가 되었다. 

화투는 놀이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어 보통 월별로 그림을 맞추어 가는 민화투, 600점을 따면 이기는 육백과 삼봉, 짓고땡, 섰다, 고스톱 등 다양한 형식의 놀이가 있다. 화투놀이는 자기에게 들어온 패의 끗수도 문제가 되지만,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패를 추리하여 치게 되므로 낮은 끗수라도 승리할 수 있어 한층 묘미가 있다. 이때는 속내를 풀풀 풍기며 권력 싸움에 나선 정치인 이상의 연기력이 필수다. 이밖에도 화투를 사용해 ‘재수보기’와 ‘운수 떼기’를 하기도 한다. 

화투는 여타 놀이에 비해 우리 역사와 사회문화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힘겨웠던 우리 민족의 시간을 달래주었던 대중적 놀이로서의 성격을 보여주었고, 전두환 고스톱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놀이규칙의 변화를 통해 사회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화투는 일본 하나후다와 유사하게 전해지다가 화투패 그림의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1950년대를 기점으로 화투의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1956. 10. 29. 경향신문을 보면 왜색화투를 정부 시책에 의해 말소 폐지하고 그 대체로 미장특허 제323호 플라스틱 재질로 바꾼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이 과정에서 판화를 4색 판으로 줄이고 기존의 종이 재질에서 플라스틱 재질로 교체하며 두께도 얇아졌다. 크기는 보통 35㎜×53㎜이며 약 1㎜ 두께로 만들어져 있다. 색깔은 붉은색이 가장 많지만, 기타 다양한 색의 화투도 있다. 

화투는 하나후다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먼저, ‘하나후다’는 뽕나무 또는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점토와 혼합하여 만든 종이를 여러 겹으로 겹쳐 판을 만든 후 위에 전통 일본식 인쇄법으로 인쇄한다. 반면에 화투는 플라스틱 재질에 현대적 기법으로 인쇄를 한다. 일본의 게임 회사인 닌텐도는 창립 초기에는 하나후다 제작 회사로 출발하였으며,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현재도 ‘하나후다’ 관련 카드들을 생산하고 있다.

화투는 정월이 솔(송학), 2월이 매화(매조), 3월이 벚꽃, 4월이 등나무, 5월이 난초, 6월이 모란, 7월이 홍싸리, 8월이 공산명월, 9월이 국화, 10월이 단풍, 11월이 오동, 12월이 비(비)이다. 각 달은 넉 장으로 10끗이나 20끗짜리, 5끗짜리 그리고 숫자로 쓰이지 않는 홑껍데기가 두 장이 있어 모두 48장이고, 열두 달 중 솔, 벚, 공산명월, 오동, 비에는 광(光)자가 씌어 있는 20끗짜리가 하나씩 들어 있다. 홍단의 문구도 다르고 청단의 문구나 색깔도 다르다.

그리고 주목할 것이 하나후다는 12월이 오동인데 화투는 오동이 11월이고 12월은 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왜 순서가 바뀌었는지에 대해 뚜렷한 정설은 없다. 그러나 필자 나름대로 추측을 해본다면 꽤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하다. 오동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의 문장이다. 하나후다는 히데요시로 상징되는 일본의 영광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화투는 마지막을 비 맞는 사람으로, 순서를 절묘하게 바꾸어 놓았다. 비는 에도시대에 유명한 강도인 오노 사다쿠로를 묘사한 것을 후에 서예가 오노 도호후로 바꾼 것이라 하지만, 한국에서는 손님이라 불린다. 결국, 일본은 결국 자기 나라로 돌아갈 (강도와 같은) 손님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박성호 동덕여대교수
박성호 동덕여대교수

언제 순서가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민간에 전승되어온 화투 타령 등의 민요를 통해 추측을 해보면 이미 일제강점기 때 현재와 같이 순서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서민층에게 널리 퍼졌던 화투는 나라 잃은 백성의 무력감과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이렇게 소소하지만, 의미 있게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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