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9월도 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을은 달콤한 팥빙수와도 푸르른 녹염과도 꽃들과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22년과도 헤어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너무나 무겁고 또 무겁습니다. 일본에서는 9월을 ‘밤이 길어지는 달’이라는 의미로 「나가츠키(長月,ながつき)」라고 합니다. 원래는 요나가츠키(夜長月,よながつき)라고 했는데, ‘밤 야(夜)’가 생략되고 나가츠키(長月,ながつき)가 된 겁니다.

도쿄이야기 포스터
도쿄이야기 포스터

7시를 넘겨도 밖이 여전히 밝아서 아직 낮이 길다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져 깜짝깜짝 놀랍니다. 갑자기 어두워지는 가을 저녁을 일본에서는 「두레박 떨어뜨리기(釣瓶落とし,つるべおとし)」라고 합니다. 우물에 두레박이 떨어지듯 너무 빨리 떨어져 버리는 가을 해를 그렇게 비유한 겁니다. “아! 낮이 짧아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그 덥던 여름도 다시 그리워지는 건 시간이 항상 거기에 머물러있을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추석에 오셨다 가셨을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며 깊어가는 가을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おづ やすじろう)의 『도쿄이야기(東京物語,とうきょうものがたり)』(1953)를 다시 보았습니다. 가족과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이 영화는 일본 최고의 걸작으로 2012년에는 세계 최고의 영화라는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바쁜 일상으로 노부모의 방문을 부담스러워하는 자식들과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노부모를 아주 담담하게 그려내는 영화입니다. 너무 차분하고 정적으로 그리고 있어 더욱 애틋한 영화입니다. 영화는 히로시마에 사는 노부부가 20년 만에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막내딸을 집에 두고 도쿄로 상경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도쿄에는 큰아들과 큰딸, 전사한 둘째 아들의 며느리, 오사카에는 미혼인 막내아들이 살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노부부의 상경은 각자 생활로 분주한 자식들에게 결코 환영받지 못합니다. 큰아들은 병원을 차릴만한 경제적 여력이 없어 도쿄 변두리에 집 딸린 작은 의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노부모가 오자 큰며느리는 손자의 방을 내주는데, 손자가 불만이 쏟아놓는 장면은 우리네 집에서도 흔히 보는 풍경입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큰딸네도 비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들은 상경한 노부모를 집에 방치하고 자신들의 일상을 꾸려갑니다. 그러다 노부모를 온천으로 효도 관광을 보내기로 하는데 밤마다 젊은 관광객들의 술판으로 잠을 설친 노부부는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고 그런 부모가 딸은 마뜩잖습니다.

노부모는 무료하고 자식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싫어 집을 나왔지만 정작 갈 곳이 없어 도쿄의 후미진 곳에서 운동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아버지는 말합니다. “이젠 머물 곳이 없어졌구먼”. 잠자리를 궁리하던 노부모는 남편을 잃고 어렵게 사는 둘째 며느리에게 신세를 지기로 합니다. 진심으로 시부모를 대하는 둘째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미안한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으로 꼭 재혼하라고 당부합니다. 다음날 딸은 지인과 술을 마시고 돌아온 아버지를 짜증스러워하고 더는 자식들에게 신세 지는 게 미안해진 부부는 히로시마로 돌아오기로 합니다. 도중에 오사카에 사는 막내아들에게 들리는데 여독 탓인지 어머니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끝내 어머니는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지만 막내아들은 기차를 놓쳐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합니다.

장례를 마친 큰아들과 작은아들, 어머니의 유품을 다 챙긴 큰딸은 서둘러 떠나지만, 자식도 아닌 둘째 며느리는 혼자 된 시아버지를 생각하며 며칠 더 머뭅니다. 그리고 그녀가 도쿄로 떠나는 날 시아버지는 “정말 고맙다.”,“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아내의 유품인 시계를 건넵니다. 마루에 앉아 밖을 홀로 내다보는 늙은 아버지를 동네 아낙은 “모두 돌아가고 쓸쓸하시겠어요?”라며 위로합니다. 그러자 “혼자되니 갑자기 해가 길게 느껴지는군요.”라고 답한다. 뜨거웠던 인생처럼 뜨거웠던 여름의 한낮은 무심하게 흘러갑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더운 여름날이 지나고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집니다. 따뜻한 차 한잔, 아님, 술 한잔 마시면 《도쿄이야기》를 보지 않으시렵니까.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 이화여자대학 졸업

◇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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