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줄었고 해외로 이민 가는 사람도 줄었다. 그러나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2019년 기준,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인의 수는 220만 명 정도로, 국내 체류 외국인 수는 최근 5년간 29.5%가량 증가하였다. 하지만 외국으로 나간 한국인의 수도 만만치 않다. 사실 우리 민족만큼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사는 민족도 그리 흔하지 않다. 한민족(韓民族)은 한반도에 약 7,000만 명(남한 4600만 명, 북한 23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5대양 6대주에도 약 800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본국의 인구대비 면에서 보면 가장 많은 민족이 세계각지에 퍼져있는 국가가 한국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은 1902년 12월, 121명의 조선인이 하와이로 향한 것이다. 이어 1905년 멕시코 이민 1921년의 쿠바 이민이 뒤를 이었다. 조선 중기 이래 만주로의 이주가 있었으며 1860년대와 1870년대 사이에 조선에서 재해와 흉년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많은 이재민이 간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도 만주와 러시아, 일본으로의 대량 이주로 1945년 해방 직전에는 한반도 전체 인구의 1/6에 해당하는 약 400만 명의 한국인이 해외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당시 한국의 대중가요에 반영되었다. 당시 우리 민족이 애창하였던 아리랑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많은 우리 민족들이 굶주림을 피하려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지로 떠나던 시기였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나운규가 연출하고 주연을 한 무성 영화 <아리랑>은 노래 아리랑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영화의 주제가로 불린 아리랑은 그 이전의 아리랑을 넘어 아리랑의 대표성을 띠게 되었고 193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리랑이 나왔다. 나운규는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서 회령까지 철도가 놓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남쪽에서 온 노동자들이 철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후에 그 멜로디를 생각해 내어서 가사를 지었으며 곡은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다.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은 이 당시를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이주 초창기를 그린 가요이다. 한국에서 유행가가 본격적으로 유행ㆍ보급되는 시기는 레코드 회사가 등장했던 1930년대의 일인데 이때 타향을 떠돌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노래가 유행했다. <방랑가>(이규송, 강윤석 편곡, 강석연, 1931), <황성옛터>(왕평, 전수린, 이애리수, 1932)와 <타향살이>(김능인, 손목인, 고복수, 1934) 등이 대표적이다.

해방과 함께 이루어진 남북 분단은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박시춘, 남인수, 1948), <달도 하나 해도 하나>(김건, 이봉룡, 남인수, 1949)와 같은 고향을 그리는 내용의 가요를 탄생하게 하였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수많은 이산가족을 낳았으며 <단장의 미아리 고개>(반야월, 이재호, 이해연, 1956), <함경도 사나이> (손로원, 나화랑, 손인호, 1953), <굳세어라 금순아>(박시춘, 박시춘, 현인, 1953) <경상도 아가씨>(손로현, 이재호, 박재홍, 1955), <이별의 부산 정거장>(호동아, 박시춘, 남인수, 1954) 등의 대중가요를 탄생하게 하였다.

1962년에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라 곳곳에 공업단지가 들어섰으며 대도시로 향하는 인구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때에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수많은 대중가요에 반영되었다. <물레방아 도는데>(정두수, 박춘석, 나훈아, 1972) <고향무정>(무인도, 서영은, 오기택, 1966), <고향 역>(임종수, 임종수, 나훈아, 1972) 등 수많은 망향의 노래가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김상진은 <이정표 없는 거리>(박대림, 정민섭, 김상진, 1970), <고향 아줌마>(김진영, 정민섭, 김상진, 1971), <고향이 좋아>(고향 작사, 남국인 작곡, 김상진 노래, 1973) 등 고향을 주제로 한 곡을 연이어 히트시켜 고향 가수라 불리기도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민법이 제정되면서 좀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을 향해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떠나는 형태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부터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 등 유럽으로 취업 이민을 떠났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로의 농업 이민도 있었다. 1970년대부터 취업과 이민과 국제결혼이 러시를 이루었으며 유학생까지 이 행렬에 동참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때 유인수의 <부라질로가는 이민선>(정월산 작사, 유금춘 작곡, 유인수 노래, 1963)이 발표되었고 <김치 깍두기>(김영일, 이봉룡, 김용대, 1970)와 같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가요가 나오는가 하면 <나성에 가면>(길옥윤, 길옥윤, 세샘 트리오, 1978)처럼 나성으로 가는 이민자를 떠나보내며 부르는 대중가요도 유행하였다. 문주란은 <공항의 이별>이후 1973년 <공항에 부는 바람>, 1974년 <공항대합실>, 1976년 <잘 있거라 공항이여>, 1980년 <공항으로 가는 길>까지 공항 시리즈를 발표했다. 현숙은 1979년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김상범 작사, 작곡)’라는 노래를 발표하였고 은방울자매는 1976년에 <타국에서>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이민 유출국이던 한국은 1980년대 말부터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2007년 3월 방문취업제의 시행을 계기로 중국 국적 동포가 중심이 된 외국 국적 동포들에게 한국 취업의 문호를 확대하였다. 또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 남성과 외국인 여성 간 결혼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에 이르러 급증하였다. 2019년 11월 기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221만 6612명이다. 2000년 당시 49만 명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불과 19년 사이에 4배 이상 불어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무색하게 이제는 고향을 주제로 한 가요들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전 지구화(Globalization) 현상에 의한 문화의 세계화와 민족의식의 후퇴, 이주의 일상화, 청소년 취향 위주의 가요계 현상 등 여러 원인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한국은 아직 다문화사회에 미숙하다. 하지만, 멕시코 가수 티시 히노호사의 <Donde Voy>와 같은 명곡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가까운 일본의 경우 수많은 고향 노래가 비교적 최근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의 다문화 정도가 좀 더 진전되어 이주민과 한국인과의 관계가 안정화된다면 고향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가 다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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