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김웅식 기자] H중공업은 30년 넘게 거래해온 기존 납품업체의 기술자료를 다른 업체에 전달해 같은 제품을 납품하게 했다가 수억원의 과징금을 물었다.

공정위는 지난해 말 하도급업체의 기술자료를 유용한 H중공업에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2억4600만원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H중공업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박용 조명기구를 납품하는 A사와 30년 이상 거래해 왔으나, 선주 P사가 'B사로부터 조명기구를 납품받으라'고 요구하자 2017년 4월부터 2018년 4월까지 A사의 기술을 유용했다.

선박용 조명은 엔진 진동, 높은 파도, 바닷물 등 특수한 상황에도 견딜 수 있어야 하기에 폭발 방지 구조, 높은 조도, 우수한 전기적 안정성 등을 갖춰야 한다. 일반 가정용 조명기구와 달리 제작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H중공업은 A사의 선박용 조명기구 제작도면을 B사에 전달해 B사가 같은 기구를 제작할 수 있게 도왔고, A사뿐 아니라 B사도 해당 기구를 제작하게 돼 경쟁 관계가 형성되자 단가 인하율도 7%로 높인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공정위에 따르면, 현 정부 들어 하도급사의 기술을 도둑질해 거래단가를 후려치기하거나 이 기술로 자체 제품을 개발하는 등의 기술유용에 대한 제재는 총 5건으로, 과징금이 평균 5억3000만원이었다. 대기업들의 하도급 업체 기술유용 근절을 국정과제로 내세운 현 정부에서조차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큰 문제다. 

한 중소 방산업체는 대기업에 원가산정 공개를 계기로 회사 정보를 제공했다 결국 사업을 접었다. 원가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영업정보와 협력업체 정보 일체가 고스란히 노출된 게 화근이었다. 이를 악용한 대기업이 다른 중소기업 협력사와 직접 거래를 진행했고, 해당 업체는 개발한 기술만 협력사에 넘긴 채 계약에서 배제됐다. 

대기업의 ‘기술 탈취’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법과 제도의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기술유용(기술탈취) 행위의 방지 또는 제재 규정이 포함된 법률은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등 10여 개가 있지만 실질적인 방지책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피해를 주장하는 쪽에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기술유용은 대기업이 자료를 감추면 피해 입증이 어렵다. 대기업과의 거래단절과 소송 장기화에 대한 우려, 소송비용 부담도 피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중소기업중앙회의 2018년 설문조사에서 중소기업 89%가 ‘대기업의 기술자료 요구를 부당하거나 불안하게 느낀다’고 응답했지만, 76.5%는 기술자료를 그냥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1대 국회에서 이 문제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피해 입증책임 완화, 대기업 배상책임 손해액 10배 상향, 손해액 추정의 구체적 기준 신설 등을 담은 법안들이 제출되고 있다. 대기업의 기술유용은 하도급 업체 피해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신뢰·국제경쟁력 저하, 노동시장 양극화로 이어지는 국가적 문제다. 

돈과 시간, 에너지를 쏟아 기술을 개발해도 정당한 보상은커녕 기술을 도둑맞고 피해를 본다면 어느 중소기업이 혁신 노력을 할까. 정부와 국회는 이들 법을 통과시켜 기술유용을 근절해야 한다. 

김웅식 편집국장 newswatch@newswat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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