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박서하
그림=박서하

일본은 1월부터 12월까지 거의 매달에 한 번쯤 밸런타인데이처럼 무언가를 기념하는 날이 있습니다. 봄이 무르익는 3월에는 일본에서 여자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나기를 기원하는 '히나 마츠리(ひな祭り,雛祭り)'라는 것이 열립니다. 일본 각지에서 여자아이들을 상대로 한 각종 행사가 열리고, 백화점에서는 이날이 되면 헤이안 귀족의 전통의상을 입은 여자아이 인형들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히나 마츠리는 삼월 삼짇날(3월 3일)에 행해지는데 이날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도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오는 봄이 시작되는 날이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화전(花煎)을 부쳐 먹는 풍습이 있다고 하네요.

사실 3월 초는 꽃이 만개하기는 좀 이르죠. 일본은 근대 이후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전환하지 않고 그대로 음력 날짜에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서 3월 3일에 히나 마츠리가 개최되지만, 원래대로라면 꽃이 만개한 4월 중순 정도에 열리는 행사였겠죠.

우리는 화이트데이를 챙기면서도 삼월 삼짇날을 특별히 명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일본은 어린 딸이 집이나 유치원 등에서 나름 성대하게 이날 행사를 치릅니다. 행사라고 하지만 뭐 특별한 건 없습니다.

집에 헤이안 시대의 귀족 복장의 한 쌍의 인형과 벚꽃과 복숭아꽃 등을 장식합니다. 아이와 복숭아 모양의 케이크나 과자, 빵, 떡을 사 먹고, 지역이나 백화점 등에서 하는 행사에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는 정도이지요.

그래도 여자아이가 있는 집에서 히나 인형을 장식하지 않는 집은 없을 겁니다. 종이로 만든 히나 인형 세트를 팔기도 하지만, 딸이 태어나면 매해 히나 마츠리에는 꺼내서 장식해야 하니 적어도 몇십만 원에서 수 백만 원을 하는 히나 인형 세트를 대체로 하나씩 구매합니다. 물론 백화점이나 공공장소는 엄청 비싼 인형 세트를 구매하겠죠. 그러니 일본에서는 전통인형을 만드는 장인들이 몇백 년 된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거죠.

요즘에도 형형색색의 기모노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아픈 곳을 인형으로 쓰다듬기도 하고, 혹시 살면서 생길 수 있는 와자와이, 즉 액운(わざわい,災い·禍)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한 쌍의 납작하게 만든 히나 인형에 복숭아 나뭇가지, 벚꽃과 같은 봄꽃을 짚으로 만든 바구니에 담아 강에 흘려보냅니다.

인형에 액막이 소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인형을 가타시로(形代)라고 합니다. 재앙을 쫓기 위해 사람 대신 신령이 들러붙게 한 인형으로 일종의 제물인 셈이죠.

원래 이 행사는 히나라는 예쁜 공주 인형이 아닌 종이로 만든 인형으로 자신의 몸을 쓰다듬어 더러움, 즉 케가레(穢れ,けがれ)라고 표현되는 액운, 병마 등을 인형에 옮겨 나뭇잎에 태워 강에 흘려보내며 딸의 안위를 기원하는 하라이(祓い)라는 행사에서 유래된 겁니다.

일본속담에 미츠니 나가수(水に流す,みずにながす)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흘려보내자는 말로 나쁜 일이나 나쁜 감정을 없던 일로 하자는 말입니다. 하라이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푸닥거리하다, 깨끗하게 하다, 부정을 없애다 등의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새해, 아이가 태어날 때, 삼재가 들어있을 때, 신차를 구매했을 때 등 신사의 신관들이 신이 깃들여졌다는 나뭇가지 혹은 힌 종이로 만든 털이개 같은 것으로 사람 혹은 물건에서 부정한 것을 털어내며 축원을 드립니다. 사람 몸 혹은 물건에 붙은 액운, 케가레를 없애버리는 거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타시로(形代)라는 인형을 만들어 냈겠지만, 그래도 나에게 뭍은 더러운 것들을 다른 어떤 것에게 떠맡기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미츠니 나가수(水に流す)행동으로 무마해서는 안 될 겁니다.

제대로 사실관계를 직시하고 반성하고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닥칠 액운을 막는 가장 좋은 액막이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를 몰래 바다에 흘려보내선 안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이화여자대학 졸업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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