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칼럼] 3월의 첫날에 삼일절이 있다. 삼일절이 기념하고 있는 3.1운동은 한국에서 일어난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의 독립운동으로 인도보다 앞서 거행된 전 국민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동학농민운동과 그 궤를 같이하면서, 6~70년대 민주화운동과 1980년대 6월항쟁, 촛불시위의 시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현행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 3·1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 있다. 손병희 선생은 1861년(철종 12) 출생하여 1922년 사망하였다. 호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동학교도들은 성사(聖師), 천도교 제3세 교주, 교종(敎宗) 의암 성사 또는 후천황씨(後天皇氏)라고도 불렀다.

의암 선생은 인내천을 부르짖은 위대한 사상가이며, 두 개의 임시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며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는 생각에 교육에 힘을 쏟아 동덕, 보성 등 전국에 수많은 학교를 경영 또는 지원한 교육자였다.

의암 선생은 22세 때인 1882년(고종 19) 큰조카 손천민(孫天民)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고 3년 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신도가 되었다. 1892년에는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에 참여했고 또한, 서울 광화문에서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부르짖는 복합상소를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가렴주구에 대항해 동학 접주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 항쟁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손병희는 탄압의 손길이 적게 미쳤던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그곳의 교세 확장, 포교에 힘썼으며 최시형에게 성실한 생활 태도와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897년 12월 24일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 일하게 되었으며, 최시형이 체포되어 처형된 뒤에는 교주가 되었다.

교주가 된 뒤에는 여러 지방을 돌며 동학의 재건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공주전투 패배 뒤에 포교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미국 시찰을 계획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망명 생활 중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의 재건에 힘쓰면서 교도들에게 새로운 문명 학술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 유학을 알선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교도의 교양을 위해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고 의정 대신과 법부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손병희는 진보회가 친일파로 되고 이용구의 동학 배반 사실을 나중에 알고 이용구 일파를 축출하는 한편, 동학을 정비하였다. 동학 포교 46년 12월 1일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도즉천도(道則天道)’를 인용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동학의 참신한 정신을 되살리며 본래의 종교운동으로 되돌아갔다.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처럼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한 때문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우리 도(道)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도라, 후천개벽은 인심개벽(人心開闢)에서 시작되는 것이요, 인심개벽은 정신개벽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정신개벽은 우리가 지금 하는 천도(天道)를 잘 행하는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

1906년 1월에 일본에서 귀국해,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의 다동(茶洞)에 설치하였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오직 종교활동만을 전개하기로 하고, 당면한 재정난은 교도들이 한 줌의 쌀을 내는 성미법(誠米法)의 제정을 통해 타개책을 모색하였다.

1911년 4월 일제가 성미의 염출마저 금지하는 탄압을 받았으나, 교도의 자발적인 특별의연금으로 보충시켜나갔다. 1914년 3월에는 무기명성미제가 실시되어 재정상태는 호전되었으며, 이는 3·1운동 때 운동자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손병희는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여자교육 기관인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 보성학원,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등과 보성학교를 비롯해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 등 다수의 학교를 지원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6년에 이미 천도교도 중에 민중봉기를 건의한 신도가 있었고,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로 국제정세는 한국독립에 유리해졌다. 이에 권동진·오세창과 1919년 일본 동경(東京)의 2·8 독립선언에 접한 최린(崔麟)·권동진·오세창이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하였다.

손병희는 천도교 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 체로 참가, 그해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탑골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하였다. 3.1운동은 국내외 독립운동 조직을 정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는 1919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건립한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로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와 이를 대행할 상설의회,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할 선전부, 독립군 자금모금을 담당할 재무부, 무기조달을 담당할 외교부 등의 집행부를 둠으로써 의회 기능뿐 아니라 사법, 행정 기능까지 갖추었다.

대통령에 손병희(孫秉熙), 부통령에 박영효(朴泳孝), 국무총리에 이승만, 탁지총장 윤현진(尹顯振), 군무총장에 이동휘, 내무총장에 안창호, 산업총장에 남형우(南亨祐), 참모총장에 유동열(柳東說)을 추대하였다.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1919년 3·1운동 직후 천도교에서 기호 지역에 대한민간정부라는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이 단체 역시 대통령 손병희(孫秉熙), 부통령 오세창(吳世昌),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내무부장관 이동녕(李東寧), 외무부장관 김윤식(金允植), 학무부장관 안창호(安昌浩), 재정부장관 권동진(權東鎭), 군무부장관 노백린(盧伯麟), 법제부장관 이시영(李始榮), 교통부장관 박용만(朴容萬), 노동부장관 문창범(文昌範), 의정부장관 김규식(金奎植), 총무부장관 최린(崔麟) 등을 선임하였다.

그러나 삼일절을 맞아 삼일운동의 대표이고 한국 임시정부 두 군데서 대통령에 추대된 손병희는 유허지가 하나 있을 뿐, 제대로 된 기념관 하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정부는 손병희를 기념하지 않고 있다. 정파와 자신의 업적 숭배 화에 관심이 없던 그는 역사에 뒤 안에서 외롭게 잠들고 있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워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