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칼럼]  얼마 전에 서울에 큰 눈이 내렸다. 아이들은 즐거워하며 눈사람을 만들고 어른들도 모처럼의 눈에 즐거운 기색들이다. 교통체증에 얼어붙은 추위는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그래도 소복이 쌓인 눈은 사람의 마음을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눈이 쌓이면 세상은 온통 하얀색 천지다. 많은 지저분한 것들이 다 눈 속에 묻히고 세상은 정말 깨끗하게 변모한다. 그래서 설분신원(雪憤伸冤) 이러는 말도 생겼다. 원통함을 풀고 부끄러움을 씻는다는 의미다. 사방천지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을 보노라면 마치 세상이란 원래 깨끗한 곳이다는 착각마저 일으키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은 전혀 깨끗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그저 세월에 의해, 권력에 의해, 집단에 의해 더러움이 묻힐 뿐이다. 눈이 녹으면 세상은 적나라하게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지난해 7월 8일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비서였던 A 씨는 강제추행 혐의로 박 전 시장을 고소했다. 그런데 박 전 시장은 고소 다음 날 실종돼 10일 북악산 인근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 전 시장이 자살하였다는 사실은 많은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고 연이어 나온 부하직원 성추행 사실이 박 전 시장을 자살하게 한 원인이라는 사실은 국민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바로 진영싸움으로 이어졌고 여당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지면서 결국 오일장을 치르고 2만여 명의 대형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이를 두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반대’ 국민청원은 이틀 만에 50만 명이 넘는 동의를 받는 등 상당한 국민의 비판을 받았으며 정영애 당시 여가부 장관후보자도 인사청문회에서 이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부적절한 행위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성운동에 헌신하였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이 된 국회의원은 박 전 시장 측에게 피소 정황을 유출하기도 하였다.

A 씨 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는 기자회견에서 박 전 시장이 A 씨에게 즐겁게 일하기 위해 셀카를 찍자며 신체를 밀착했고 무릎에 난 멍을 보고 '호' 해주겠다며 무릎에 입술을 접촉했을 뿐 아니라 집무실 내실로 불러 안아달라며 신체접촉을 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서울시 직원들의 방조 의혹 등을 수사했지만 지난해 12월 박 전 시장의 강제추행 및 성폭력처벌법 위반(통신매체 이용 음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 고소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했다.

공소권 없음은 불기소 처분의 하나로 피의사건에 관해 소송조건이 모자랐거나 형이 면제되는 경우에 검사가 내리는 결정이다. 범죄성립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사 결과 범죄 사실이 입증되지 않을 때 내리는 무혐의 결정과 구별되는 처분이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려는 일체의 노력은 중시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마치 흰 눈이 세상을 덮어버리듯 그대로 묻히는 듯했다.

경찰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업무용 휴대전화를 유족 측에게 돌려주었고 휴대전화 전체 내용이 복사된 이른바 '이미징 파일'까지 삭제하였다고 한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쓰던 업무용 휴대전화는, 성추행 혐의 등 사건의 실체 규명을 위한 핵심증거물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변사 사건이라 범죄 혐의점이 없으면 내사종결과 함께 돌려줄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였다.

업무 전화기는 서울시 소유지만, 경찰 수사 발표전 유족이 서울시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는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설분신원(雪憤伸冤)은 박 전 시장의 관점에서 적절한 표현이 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지난 14일 법원에 의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실이 인정되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동료 직원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 사건에서 법원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공개하며 “(피해자가) 고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판단했다.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전혀 별개의 사건에서 법원이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사실로 판단한 것이다.

재경지법 형사부의 한 판사는 “피고인 쪽에서 박 전 시장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이라고 주장했으니 재판부에서는 우선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이 있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결과가 피고인의 행위 때문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을) 판시한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묻힐 뻔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일부라도 사실이라고 판단을 받은 것이다. 역시 눈이 녹은 다음의 세상은 자신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기 마련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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