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박서하   
/그림=박서하   

일본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대개 일본어가 다른 나라 언어보다 배우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주 완벽히 틀린 말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일본은 한국처럼 한자문화권이고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식 한자어에 익숙한 우리에게 일본어는 다른 어떤 언어보다 배우기 어렵지 않습니다.

듣기, 말하기는 개인차가 있지만, 문법도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고 예외도 적어 중급문법까지는 3개월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살다 보면 일본어를 잘하는 서양인들은 참 많은데, 일본어를 정말 잘 구사하는 한국인을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어순이 같고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한자어도 많아서 그냥 일본어에 한국어를 대입하여 사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그렇게 사용해도 의사소통에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일본어, 그러니까 일본어다운 일본어가 아닌 거죠. 언어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문화의 거울로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와 결합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야말로 그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일본은 아직도 왕이 있는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 일본은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로 왕실 관련 표현은 일상의 일본어와 크게 다릅니다. 대상에 따라, 입장에 따라, 같은 말이라도 달리 표현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말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내가’ 혹은 ‘누군가가 무엇을 했는가’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는 한국어와 달리 일본어는 행위를 한 주체로 표현하는 것을 되도록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영어도 수동태를 사용하지만, 이는 타동사일 때 한정됩니다. 하지만 일본어는 울다, 죽다 등과 같이 자동사인 경우에도 수동태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훔쳐 가다‘가 아니라 ‘도둑질 당했다(盗まれる)’
‘선생님이 칭찬하다’가 아니라 ‘선생님에 의해 칭찬을 받는다(先生に褒められた)’
‘누가 내 발을 밟다’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발이 밟힌다(だれかに足を踏まれた).’
‘한국인은 이 책을 많이 읽는다’가 아니라 ‘이 책이 한국인에게 많이 읽힌다(この本は韓国人によく読まれる)’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한국식으로 표현해도 일본인들은 알아듣지만 일본식 표현은 아닙니다. 한국식 일본어는 일본인에게는 자연스럽지도 않지만, 너무 자기주장이 강한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그래서 일본 유학 초기에는 일본인 친구들에게 한국인은 표현이 너무 세다 등과 같은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인의 언어 습관은 대인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일본인의 삶의 자세와 맞닿아 있습니다. 물론 수동태 형식의 표현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일본인이 수동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일에는 그 누구보다 책임을 지고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결정하고자 할 때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의견을 조합하여 결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본인의 이러한 자세를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 때문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에 저지른 자신들의 잘못을 내가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해서 과거에 떠넘기고 살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일본 젊은이들의 책임지는 삶에 욕망이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 생각과 가치관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이태원클래스’, ‘사랑의 불시착’과 같은 ’한국드라마가 일본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게 된 배경이 된 게 아닌가 합니다.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이화여자대학 졸업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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