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칼럼] 지난 광복절에 김원웅 광복회장이 한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에서 언급한 ‘친일 청산’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김 회장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을 “반민특위를 폭력적으로 해체시키고 친일파와 결탁했다”라며 호칭도 ‘이승만’으로 하였다. 광복절이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과정을 아울러 기념하는 날인데 김원웅 회장은 정부 수립 기념일에 초대 대통령을 향해 “친일파와 결탁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김 회장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을 ‘민족반역자’라고도 불렀다. 아이러니하게 이날 경축식에선 그 애국가가 연주되고 물론 문재인 대통령 등 참석자들은 바로 광복회장이 ‘민족반역자’로 비판한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그 애국가를 부른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춘 분이라고 칭송했다.

이거는 뭔가 부자연스럽다. 민족반역자가 초대 대통령을 하고, 그 뒤를 이어 현재 대통령직에 있는 분이 민족반역자가 만든 애국가를 불렀는데 이분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신념을 가진 분이라는 것은 어색하다.

게다가 그 초대 대통령은 독도를 한국 땅으로 정하고 이를 지켜온 사람이고 또 독립운동에도 관여해 일본에 의해 수차례 투옥되고 게다가 1919년 9월 6일,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 의해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반대하였는데 당시 남한의 독립에 역할을 한 미국의 영향력은 상당히 강하였고 이승만의 대통령직 수행은 이러한 조건 아래 행사될 수밖에 없었다.

남한에 반공 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산세력에 대항할 세력으로 친일파에 주목한 미 군정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미국의 영향력이 당시의 반민특위 행동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역설적으로 한국 민족주의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는 일본에서 첼로를 전공한 뒤 1930년 미국으로 가서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하기도 하는 등 첼리스트로서 활약했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작곡하기 전까지 애국가는 현재의 애국가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멜로디를 붙여서 부르곤 하였는데 이 곡이 애국가의 가락으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여 새로이 작곡하였다고 알려졌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유럽으로 건너간 이후, 특별히 1938년부터 1944년까지의 행적이 논란 중이다.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였다느니, 일본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다느니 하는 것들이 그 내용이다.

‘친일파'라는 말도 일본식 한자어 표현으로 특정 국가를 좋아하고 잘 안다는 뜻이며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와는 다른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에서 친일파는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동의어가 됐다. 일부 친일 세력들이 6.25 전쟁과 냉전 구도 속에 재기에 성공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명하거나 부각하기는 어려운 조건들이라 친일파란 단어는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친일파를 척결하자!!"는 말은 일본인에게 '한국은 곧 반일'이라는 오해를 얻게 되는 부작용도 생겼다.

외국의 사례를 들면서 프랑스의 역사청산을 부러워하는데 프랑스의 반민족 행위자는 1940년 6월 26일부터 1944년 8월 25일까지의 4년 2개월간의 나치 협력자를 말한다.

파리 해방 이전에 레지스탕스 조직은 비상군법회의 형식의 재판을 통해 프랑스는 나치 협력자 8000~1만 명을 처형했고, 해방 이후 협력자재판소, 시민재판부, 고등협력자재판소 등에서 나치 협력자를 처벌하였다.

1944년부터 4년간 32만여 명이 협력자 혐의를 받았고, 실제 12만 5000여 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후로도 프랑스는 1980~1990년대에 '반인도죄' 재판을 진행해 과거 청산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반면 한국은 독립군에 의한 소수의 매국노 처단과 682건의 반민특위 활동 성과를 내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의 친일파청산, 정확히 이야기하면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은 프랑스의 그것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로 기간의 차이이다. 일제 강압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권을 빼앗긴 1905년의 한일병탄, 더 나아가 1876년의 한일수호조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40년, 70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하에 있었던 셈이 된다.

태어나보니 이 땅의 국호는 일본이었고 교육도 일본식으로 받았다고 하면 지금의 잣대로 그 사람의 삶을 비난하거나 그에게 항일의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1910년 이후 조선의 출생자는 자신이 일본 사람으로 의식하고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1930년대 이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로 행해지지 못했다. 4년간의 프랑스와는 양상이 다른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는 프랑스와는 달리 세계 제2차대전의 당사자가 아니었으며 변방인 아시아의 소국이었다. 자주독립이 아닌 외국 간 협상에 의한 해방이었기에 매국노,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대한 외국의 관심도 없었고, 자체적인 힘도 없었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와중에 벌어진 매국노 처단 외에는 청산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세 번쨰로 남북의 분단이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이 나뉘면서 독립운동 진형이 나뉘었고 1950년 북한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이러한 양국 간 사정의 차이는 과거 청산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 준다.

지나버린 과거에 매달릴 게 아니라 미래를 보고 살자며 말하는 자도 있고 과거를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올바른 현재도, 미래도 없다며 일제 잔재 청산을 부르짖는 이들도 있다.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보자는 말도 있다.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해 필자는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일을 이념 대결로 몰고 가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이 사용해왔던 친일파라는 단어는 일본 제국주의를 따르거나 그 혜택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사회적으로 친일파라는 호칭은 치욕이다.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그래서 친일파라는 용어는 보수 진영에서 빨갱이라 비난하는 것처럼 내집단 외집단 편 가르기 용어로 사용되곤 한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다시 조상과 역사를 욕보이는 짓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후예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올바른 역사관은 어떤 것일까? 자신의 전력으로 인해 누구보다 과거사에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한, 김원웅 광복회장의 이번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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