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오피니언 외부칼럼
환향녀와 다문화박성호 / 동덕여대 교수
▲ 박성호 동덕여대 교수

화냥년이라는 말이 있다. 제 남편이 아닌 남자와 동침하는 여자를 일컫는 말인데 이 말에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숨겨져 있다.

조선 중기인 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여 조선은 일방적으로 몰리다, 1637년 1월 30일 결국 인조는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림)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당시 청군의 무자비한 겁탈에 강화에 온 많은 양반 부녀자가 자결했으며, 강화 앞바다에 몸을 던졌다. 많은 여성이 청군의 포로가 돼 이역만리 만주 땅으로 끌려갔다.

특히 청군이 장기간 주둔한 남한산성 주변과 강화도, 인근 경기 지역에서는 도성에서 피란 온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 이때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끌고 간 조선의 여자가 50여만 명이었다. 그 후 전란이 수습되자 조선인 포로 쇄환문제가 대두돼 많은 속가(贖價)를 주고 포로를 석방케 하는 일이 진행됐다.

이국땅에서 온갖 수난을 당한 부녀자들이 친정 부모나 남편, 자식들의 노력으로 풀려나 오랜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청나라 군대에 전리품으로 끌려갔던 여인들 중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을 일컬어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그러나 그녀들을 고국에서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포로가 됐다가 송환된 환향녀(還鄕女) 처리문제는 조선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는데 정절을 잃은 부녀로 간주된 그녀들은 죄인이므로 조상의 제사를 맡길 수 없으니 이혼시켜야 한다는 사대부의 상소가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여성차별과 유교적 전통, 명분에 사로잡힌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수많은 환향녀는 행실이 난잡한 ‘화냥년’이 돼 가문에서 축출당하여야 했다. 또한 이 환향녀 중에는 돌아올 때 이미 임신을 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녀들이 낳은 자식을 오랑케의 자식이라 하여 호래자식 또는 호노자식(胡奴子息)이라 했다.

외침이 많았던 우리의 역사에 자신을 방어할 여력이 부족한 여성들의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에 의해,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에 의해 끌려갔던 여인들 등 많은 외침과 그 외침마다 이러한 비극이 있었음은 쉽게 짐작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방적인 약자였던 여성은 보호받지 못하였으며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도 전혀 위로받지 못하였다.

‘화냥년’이라는 말은 이러한 우리의 편협과 비겁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말이다. 또한 우리는 단일민족이란 의식이 강한데 이런 역사적 아픔이 단일민족이라는 의식 안에 숨겨져 있으며 이러한 의식이 타문화,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이주노동자의 급격한 증가와 농촌 총각의 국제결혼 급증으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다문화라는 말은 새로운 말이 아니다.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과 외국인의 결혼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 해 결혼한 다문화 부부의 절반가량이 이혼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들이 원만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이 절실하다.

서울시가 조사한 '2012년 다문화인구 지표'를 보면, 그해 다문화부부 6252쌍이 혼인을 했고 3005쌍이 갈라섰다고 한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부딪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를 점점 많이 느끼게 되고 서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또한 이제 혼혈아동은 쉽게 볼 수 있으며 이 혼혈아동의 비중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사회의 일각에서는 혼혈아동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환향녀로 상징되는 단일민족의 편협과 배타성에서 벗어나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키울 수 있는 정부의 정책이 적극 필요한 시점이다.

 

 

뉴스워치  webmaster@newswatch.kr

<저작권자 © 뉴스워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워치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