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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온 편지(18) 난민일기 #3. 예수님은 원조 난민티처 정 / 미얀마 기독교엔지오 Mecc 고문
▲ 미얀마 호수의 일출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이야말로 원조 난민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길을 떠나시면서 ‘입은 옷과 지팡이를 빼고는 두 벌의 옷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라 하더라도 제자들은 좀 심하다고 생각했을 거 같습니다. 숙식도 한 곳을 정해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지팡이는 요즈음에는 스마트폰 정도로 이해한다쳐도 옷이 더러워지면 빨아 입고, 햇볕이 뜨거워도 밀집모자도 없이, 게다가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고 복음을 위해 먼 곳까지 떼지어 다니셨으니. 그게 난민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 쿠알라룸푸르 난민학교 수업

조수아 선교사께서 그래서 “저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국제 난민처럼 살게 했어요. 다 힘든 선교지였지요. 호주와 중국을 거쳐 여기까지 와서 난민사역을 맡기신 것도 다 이유가 있었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이야말로 원조 난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하고 웃으십니다.

조 선교사께서 정글 속으로 오가며 돌보던 난민학교는 마침내 유엔의 보호 아래 쿠알라룸푸르 외곽에 세워졌습니다. 삐쩍 마른 미얀마 난민 아이들의 모습은 사진으로 공개하기가 참 괴롭습니다. 부모들은 난민카드를 받아 타국으로 떠나든 수용소에 갇히든 한가지 바램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엔이 갖는 목표처럼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고 싶은 바램입니다. 미얀마 난민을 위한 엔지오 Mecc의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고향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게 꿈입니다.

▲ 난민학교 컴퓨터 교실

아이들은 중등과정까지 공부하고 영어도 공부해서 부모를 따라 해외로 나가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난민학교에서는 올해부터 영어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160여 명이 유급교사 네 분과 봉사교사 세 분 아래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국, 미국 공관 주재 부인들도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더 받아야 하지만 예산이 부족합니다. 점심도 제공해야 하고 교사들 급여와 임대료도 필요합니다. 꾸준한 지원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난민교회도 속속 세워졌습니다. 깨봉가스펠센터교회, 피제이교회, 푸두교회, 수방교회, 셀렘반교회, 라왕교회. 6곳의 교회에 6분의 미얀마인 목회자가 세워지고, 각 부족별로 부족의 언어로 예배를 드립니다. 한국에서 온 한 선교사 부부가 이룬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귀중한 축복입니다.

▲ 쿠알라룸푸르 인근 관광지

이제 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미얀마 양곤에 온 과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2007년 여름, 저는 언론사 퇴직후 신문방송 홍보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 직원이 크리스챤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요일에는 정오에 간단한 기도모임을 가졌는데, 초대한 목사님으로부터  미얀마 난민 얘기를 들었습니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어마어마한 난민들이 밀려오지만 도울 길이 없는 막막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회사에서 휴가중에 단기 선교지를 찾는 중이어서 직원들이 쿠알라룸푸르로 가고싶어 했습니다. 저는 가지않고 학용품, 쌀, 부식비 등 준비만 해주었습니다. 단기선교를 다녀온 직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정글 속에서 지낸 사진들입니다. 아이들 학교도 정글 속에 있고. 뜻밖이었습니다. 직원들은 많은 것을 느끼고 체험하고 온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가질 않아서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앞만 보고 달린 인생입니다. 겉만 크리스챤이지 속마음은 탐욕으로 가득 차 사업을 벌리다보니 법인이 5개나 되었고, 베트남에는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해외사업장까지 있었습니다. 회사의 MT를 제주도로 다니다 나중엔 80명을 데리고 필리핀 세부 휴양지로 비행기를 전세내어 가기도 했으니. 어느 날부터 마침내 회사가 하나하나 곪기 시작했습니다. 침몰이 시작되었습니다. 쿠알라룸푸르 선교지로 보내던 헌금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 쿠알라룸푸르 도심 분수대 야경

그럼에도 제 꿈은 은퇴 후 그리스 아테네에 가서 사는 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 조수아 선교사께서 오셨습니다. 저를 많이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 본토에는 종교적인 박해로 아이들이 고아 아닌 고아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남편들이 먼저 떠나다보니 엄마들이 가난에 지쳐 아이들을 교육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 ‘분단된 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 제가 있는 공동체에도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 절반이 넘습니다.

저도 난민아닌 난민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저의 두 딸은 유학갔다오고 대학을 졸업해 취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키운 딸들입니다. 저는 사업을 다 정리하고 고향 바닷가로 내려갔습니다. 노인들만 20여 분 출석하는 시골교회를 섬기며 1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파도와 살았습니다. 바닷가를 거닐면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년 후, 저는 쿠알라룸푸르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조 선교사님, 지금 양곤행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티처 정 프로필-----

강원도 삼척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일요신문 사회부장
경향신문 기획팀장
MBN 투자회사 엔터비즈 대표이사
현 희망마을 사회적 협동조합 고문
현 미얀마 고아와 난민을 위한 기독교엔지오 Mecc 고문으로 양곤에서 근무
e-mail: mpr8882@hanmail.net

 

뉴스워치  webmaster@newswat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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