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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돋보기] 문경새재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문경새재는 한반도에서 영남과 수도권을 잇는 고갯길이다. 문경새재는 경상북도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을 경계로 한 고갯길로 영남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에 위치해 있다.

‘새재’라는 이름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이야기가 있고, 새(억새)가 많아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지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새로 낸 고갯길’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문경새재는 역사적으로 깊다. 그것은 영남의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 가기 위해 넘은 고갯길이기 때문이다. 문경의 옛지명이 문희(聞喜) 즉 경사스런 소식을 듣게 된다라는 뜻으로 과거시험과도 연관이 깊다.

때문에 문경새재는 과거 급제를 바라는 선비들이 좋아했던 고갯길이다. 이런 이유로 호남의 선비들도 일부러 멀리 돌아 이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그만큼 선비들이 문경새재를 통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나아갔다.

문경새재는 태종 13년(1413년)에 개통됐다. 이 문경새재 전에는 계립령의 하늘재가 주요 교통로였다.

문경새재가 열리면서 사회, 문화, 경제는 물론 국방상의 주요 요충지 중 하나가 됐다. 때문에 문경새재는 임진왜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립 장군이 문경새재에서 막지 않고 왜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데 사실 임진왜란 전까지 이곳에는 방어시설이 사실상 전무했다. 신립 장군으로서는 부하 장수들이 문경새재에서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고 했지만 충주 달천까지 후퇴를 해서 배수진을 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방어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전쟁 이후 조정은 문경새재에 방어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서애 유성룡은 관문의 설치를 주장했고, 선조 30년(1597년)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면서 일자형 성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령산성이 축조됐다.

임진왜란 이후 세 개의 관문이 설치됐는데 첫 번째 관문은 주흘관(主屹關)으로 숙종 34년(1708)에 설치됐으며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두 번째 관문은 조곡관(鳥谷關)으로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했으며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관문은 조령관(鳥嶺關)으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문경새재는 20세기 초에 차량이 다니는 이화령 고갯길이 만들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경새재에 설치된 관문과 새재 고갯길은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됐다.

무엇보다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와 임지를 떠나 구(舊) 경상도 관찰사가 새로 부임하는 신(新)경상도 관찰사를 만나 관인을 주고받는 교귀장은 그 풍치를 더하고 있다.

문경새재는 한번 걸어볼만한 코스이다.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가족단위로 걸을 수 있다. 또한 경복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야외세트장이 있기 때문에 가족단위로 구경을 하기에도 좋다. 오늘날의 광화문이 아닌 옛 광화문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은 구경거리다.

어기선 기자  newswatch@newswat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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