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더운 여름, 일본의 어느 가정에서든 일주일에 한두 번은 해 먹는 음식이 〈소우멘(素麺,そうめん)〉입니다. 사실 뭐 요리랄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음식 이름이 아닌 가는 국수를 소면이라고 부르고 있어 ‘소우멘이 음식 이름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엿한 음식 이름입니다. 냉모밀처럼 와사비다 뭐다 준비할 것도 없이 소면을 삶아 차가운 물에 헹궈서 쯔유(つゆ)라는 다시 간장에 찍어 먹으면 그만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요리죠. 쯔유를 직접 만들면 좀 번거롭겠지만, 요즘은 거의 시판되는 쯔유를 사용하고 있어 면만 삶아서 간장에 찍어 먹으면 되니 입맛도 없고 아무것도 해 먹고 싶지도 않은 더운 여름 이보다 좋을 수 없습니다.

나가시소면을 먹는 모습./이미지=イラストAC인용
나가시소면을 먹는 모습./이미지=イラストAC인용

단순한 요리이기에 재미를 더한 것이 ‘소멘나가시(流しそうめん)’와 ‘나가시소멘(そうめん流し)’입니다. 명칭은 다르지만 먹는 방법은 같습니다. ‘소멘나가시’는 소면을 흘려보내는 장치를 사용하는 거로 최근에는 ‘소멘나가시’ 기계도 간단히 살 수 있습니다. 한편, ‘나가시소멘’은 세로로 반 자른 대나무를 비스듬하게 잇고, 대나무 끝에서 차가운 얼음물과 함께 소면을 흘려보내면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이 흘러 내려오는 소면을 젓가락으로 건져 먹는 거를 말합니다. 그러다 바닥으로 소우멘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안타까운 함성을 지르기도 하는데, 지치기 쉬운 더운 여름날 차가운 얼음물 속의 ‘소우멘’ 낚시!! 상상만 해도 즐겁죠?

‘나가시소면’의 ‘나가시’라는 말. 왠지 익숙하시죠. 1995년 8월 12일, 전직 대통령의 ‘4천억 가차명계좌수사’ 담당 검사가 수사 결과발표에서 “한마디로 나가리죠”라는 발언을 합니다. 당시, 이 발언이 부적절하다며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도 있죠. 영화 〈신세계〉에서 강형철이 한 “아아 이러면 완전히 나가리인데?"라는 대사를 기억하시는 분도 많을 겁니다. 이처럼 ‘나가리’는 판이 무산됐다는 의미의 말로 화투게임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합니다. 물론 일본의 화투게임에 ‘나가리’라는 말은 없습니다.

일본어 ‘나가시(流し)’가 언제 ‘나가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본어, ‘나가시’는 동사 ‘나가수(流す,ながす)’의 명사형입니다. 의미는 ①물, 눈물 같은 액체를 흘려보낸다 ②물건이나 사람을 이동시킨다. 주로 나쁜 쪽으로 흘려보낸다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유배 보내다 등으로 사용합니다. ③무효로 하다. 없던 일로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세 번째 의미 때문에 우리나라의 ‘나가리’가 된 것 같습니다.

다시 소면 이야기로 돌아가죠. 마트에 가면 소면, 중면을 팔고 있어 소면의 소가 ‘작다(小)’을 소자를 쓰는 건가 싶지만 한자를 보면 ‘작을 소(小)’가 아닌 ‘본디 소(素)’를 씁니다. 옛 문헌에 소면을 ‘왜면’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의 한자, ‘소면(素麺)’를 그대로 빌렸고 그 과정에서 소를 ‘작을 소(小)’로 착각하여 중면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소면(素麺)’이라는 한자를 쓰고 있지만, 일본에서도 가는 면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지름 1.3mm 미만의 면을 소우멘(そうめん), 이보다 굵은 1.3mm-1.7mm 미만의 면을 ‘히야무기(ひやむぎ)’라고 하지요.

소면이 우리의 식문화로 편입된 것은 해방 이후입니다. 쌀 부족에 시달리던 우리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원조받은 밀가루의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혼분식장려운동을 합니다. 그러면서 밀가루로 된 짜장면 칼국수 멸치국수 등 다양한 면 요리가 우리 식탁에 등장하게 되죠. 포장마차에서 장터국수 하나 말아먹는 추억의 장면은 소면 기술을 일본에서 들여와 소면이 대중화된 1960년 이후의 일인 거죠.

일본의 ‘소멘나가시(そうめん流し)’는 「소면을 흘리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함께 「소면을 먹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 꽤 왁자지껄하게 먹는 음식입니다.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소면을 경쟁하듯 건져 먹는 ‘소멘나가시(そうめん流し)’는 일본의 여름나기의 하나의 풍물입니다. 코로나 재확산으로 우리의 모임들이 다시 ‘나가리’되는 안타까운 요즘, 다 함께 모여 ‘나가시소우멘’ 어떠십니까?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 이화여자대학 졸업

◇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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