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 칼럼]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종전의 조서(終戦の詔書)》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내려가는 일왕,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이 방송이 송출된 한국, 대만, 만주에 살던 사람들은 물론 일본인들도 조차도 일왕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종전의 조서(終戦の詔書)
종전의 조서(終戦の詔書)

“짐(朕)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일본제국의 현실을 생각하여 비상조치로써 이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성스럽고 선량한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서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보하게 되었다”. (朕深ク世界ノ大勢ト帝國ノ現狀トニ鑑ミ非常ノ措置ヲ以テ時局ヲ收拾セムト欲シ茲ニ忠良ナル爾臣民ニ告ク.朕ハ帝國政府ヲシテ米英支蘇四國ニ對シ其ノ共同宣言ヲ受諾スル旨通告セシメタリ)

이 말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을 때 사람들은 “공동선언 수락”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을 겁니다. 여기서 공동선언이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못 박은 포츠담 선언으로 1945년 7월 26일, 일본에 전달했지만, 군부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미군은 급기야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8월 9일 소련군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부는 8월 10일 밤 12시 30분, 지하벙커에서 일왕이 참석한 회의를 개최합니다. 그 자리에서 총리,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는 이 전쟁에 대한 결단을 일왕에서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8월 14일 일본은 미국에 포츠담 선언 수락을 전달하였고, 그다음 날 일왕은 직접 국민에게 라디오를 통해 수락 사실을 전했지만, 선언의 내용까지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종전의 조서》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 8월15일이 가까워지면 거의 모든 방송사에서는 일왕이 국민에게 당부하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견딤으로써 만대를 위한 태평 시대를 열기를 원한다. (堪え難きを堪え、忍び難きを忍び もって万世のために太平を開かんと欲す)”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방영합니다. 그렇다면 일왕은 《종전의 조서》에서 무슨 말을 한 것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짐은 일본제국의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 타국의 주권과 영토를 침탈하는 것은 애초부터 짐의 뜻이 아니었다. 지난 4년 군인들과 관료, 일억의 백성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국면은 호전되지 않았고, 적은 잔악한 폭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멸망만이 아니라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일이다. 이에 자식 같은 백성을 지키고 왕실의 조상님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공동선언에 응하기로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짐은 일본제국과 더불어 시종 동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동맹국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의 신민으로 전선에서 전사하고, 맡은 직무로 순직하고, 비명에 죽어간 자와 그 유족에 생각이 미치면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다. 또한, 상처를 입고, 재화를 당해 가업을 잃어버린 자들의 후생을 생각한다면 깊은 걱정이 되는 바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일왕은 결코 타국을 침략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감행한 전쟁으로 동맹국들의 협력에도 미국의 원자폭탄으로 더는 무고한 희생을 만들 수 없어 전쟁을 중단한다는 것입니다.

일왕이 일억 명의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의 국민도 포함한 숫자로 그는 마치 식민국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처럼 말합니다. 그는 제국의 신민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질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아 해방을 기치로 내건 침략전쟁에 우리의 조상들은 그 누구도 자발적으로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신민이 되고자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런 전쟁에 끌려가 무고히 죽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일왕은 ‘항복한다.’, ‘우리는 전쟁에 졌다.’, ‘이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신민들이 열심히 싸웠는데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국민들에게 전쟁 후에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견딤으로써 만대를 위한 태평 시대를 열기를 원한다. 짐은 국체(國體)를 수호하고 충성스럽고 선량한 백성과 항시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일왕은 자국의 국민에게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전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피해를 준 주변국에 항복과 사죄의 말을 전했어야 합니다. 원폭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였지만, 이는 그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며, 일본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최유경 교수
최유경 교수

◆ 프로필

◇ 이화여자대학 졸업

◇ 오사카부립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 서울대, 성균관대 등 다수대학에서 강의

◇ 서울대인문학연구원, 명지대 연구교수, 학술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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