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 / 동덕여대 교수

 

언제인가 글을 보는데 우리나라를 다문화국가가 아닌 아시아문화국가라고 표현해 놓은 대목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이 대부분 아시아국가 출신이라 다문화사회로 보기 어렵다는 취지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이주민이 유럽이나 미국 등의 국가 출신이어야 다문화국가라는 의미인데 참으로 어이가 없는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문화국가라 함은 문자 그대로 다양한 문화를 가진 다양한 국가로부터 온 이주민이 함께 모여 사는 국가를 의미할 뿐이다.

아시아의 국가인지 유럽에 있는 국가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아시아출신 이민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해 다문화국가라 보기 어렵다는 말은 아시아출신 이주민에 대한 비하할 뿐 다문화라는 현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다.

근대국가에서 국민은 정치적으로 절대적 주권을 지닌 존재로 공통의 언어, 종교, 국가적 상징물에 대한 일체감과 동질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전제된다.

국민 혹은 인민은 하나의 문화사회적 주체이며 이는 민족적일 수도 있으며 문화적일 수도 있고 철학적일 수도 있다. 이 국민이 단일 국가에 연계될 경우 이를 국민국가라 한다.

근대에는 대부분의 국가는 국민국가였다. 개인 국민은 공유된 정체성을 통하여 구분되며 거의 항상 선조, 부모 또는 혈연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기원을 공유한다.

국민적 정체성은 개인이 그 정체성에 속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앤더슨은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19세기 후반, 계몽주의사상 속에서 탄생한 국민은 서로를 거의 알지 못하지만 같은 민족(nation)이며,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또한, 국민은 법으로 구획된 영토에서 주권을 지니고 있으며, 수평적 동료의식, 나아가 형제애를 지니고 있다고 상상하는데, 이러한 상상체로서의 국민의 탄생에는 민족주의의 문화적 산물인 시, 소설 등 소위 국민문학으로 통칭되는 것을 통한 애국심의 고취와 이를 통한 국민통합이 이루어졌다고 지적했다.

근대에 있어서 국가가 주관적인 국민국가로서 구성되었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국가의 영역을 단위로 하는 국민경제로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친 민족주의 운동의 발전 속에서 각 민족이 각각 국가를 만드는 민족자결의 주의가 주장되면서 이 물결은 세계를 크게 흔들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식민지 국가를 해체하는 계기가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분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산업의 발전과 세계화는 대규모의 이민노동자들을 만들어 냈다. 초기의 이민자들은 일시적 노동력의 결핍을 보충하려 다른 나라로 건너갔고, 대부분은 일시적인 체류였으나 자녀들의 성장과 더불어 그 사회에 적응하게 되는 일이 많아지게 되자, 주류문화에는 편입하지 못하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적지 않은 규모의 다양한 문화적 관습을 지닌 인종집단의 정주로 이러한 국가들은 더 이상 단일국가 정체성을 고집하기가 어렵게 됐다.

정체성의 동질성에 기반하고 있는 국민국가 모델에 따라 수립된 근대적 질서가 새롭게 출현한 다인종적 상황과 모순에 빠지게 되자 다인종적 상황에 대한 다양한 정책모델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차별모델(Differentialist model), 동화주의 모델(Assimilationist model)이고 동화주의 모델의 실패로 등장한 것이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이다.

다문화국가는 다양성 수용과 상호인정으로 이것은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자신과 타자의 구별을 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다문화를 주류 문화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다문화국가는 개인을 동등한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하고 다문화 국가의 구성원은 다양한 다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다문화라는 용어 역시 경제적 논리로 재단되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의식 가운데는 미국이나 캐나다 혹은 유럽 선진국 출신 외국인에게는 다문화라는 용어를 적용하지 않는다.

필리핀이나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 출신 이주자에게만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다양성 수용과 상호인정을 거부하는 동화주의의 발로로 여겨진다. 이제 동화주의를 넘어 이주민의 문화와 정체성을 살려나갈 수 있는 진정한 다문화주의 토양이 필요하다.

저작권자 © 뉴스워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