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문신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당대를 대표하는 사나이 중에 사나이였다. 일찌기 안동김씨 명문을 일으킨 훌륭한 선비이자 벼슬아치로 정승의 지위까지 오른 위인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피신했던 인조가 청나라 임금에게 항복서를 바치려하자, 청음은 그 항복서를 찢으며 나라의 정기를 살리자고 외쳤다. 끝내는 화의에 반대한 척화파로 몰려 중국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것은 역사에 너무 유명한 이야기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세월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이 시조를 읊으며 청나라로 끌려가던 김상헌의 기개는 대단했는데, 역시 그런 선비는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청백리에 빛났다. 고전에는 그에 대한 칭찬이 자주 등장한다.

“김상헌이 벼슬살이에 청백했다. 어느 벼슬아치가 자기 부인이 뇌물을 받아 비방을 듣고 있음을 걱정하자, 김상헌은 ‘부인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으면 비방이 그칠 것이다’고 일러주었다. 그 벼슬아치가 크게 깨닫고 그 말대로 하였다. 그 부인이 항상 김상헌을 욕하기를, ‘저 늙은이가 자기만 청백리가 되었으면 그만이지 왜 남까지 본받게 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金淸陰尙憲 居官淸白有一官人 憂其婦女受賂有謗 公曰婦人所請 一不施行 則謗息矣官人大悟 一如其言 婦人常罵金公曰 彼老漢 自爲淸白吏足矣 何令人效之 使我喫苦如此)."

청백리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유로 욕을 먹는 청음, 그 욕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욕인가.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 ‘베갯머리 송사’라는 말이 있다. 남편이 고관인 경우 부인에게 뇌물을 주면 가장 약효가 크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부인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약한 남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이다. 아무리 부인에게 뇌물을 바쳐도 남편이 부인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뇌물의 효험은 없어지고 부인에게 뇌물 바치는 일도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성완종 게이트'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하기 직전 남긴 메모지와 녹음파일이 공개되면서 현직 총리를 비롯한 권력실세 다수가 포함된 권력형비리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메모지에 적힌 이들은 누구던가. 우선 현직 이완구 국무총리를 비롯, 박근혜 정부의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부터 현직 비서실장이 모두 적시돼있다. 허태열(1대), 김기춘(2대), 이병기(3대, 현재)가 그들이다.

이와함께 새누리당의 사무총장을 지낸 서병수 현 부산시장과 그의 바통을 넘겨받은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은 지금까지 집권여당의 사무총장이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2007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 경선후보의 비서실장이었고, 홍준표 경남지사는 경남기업의 모태인 경남지역의 수장이다.

박근혜 정부를 만들었고, 움직이고, 지탱하는 그야말로 박근혜 정부의 실세들인데, 성 전 회장은 그런 이들에게 각각 수 억원을 줬다고 털어놓았다. 시계 2015년 서글픈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메모 내용대로라면 일국의 총리부터 청와대의 비서실장, 집권여당의 사무총장까지 돈으로 매수해 권력을 쥐려했던 셈이니, 사실상 대한민국을 돈으로 사려한 것에 다름아니다.

돈으로 권력을 사고, 권력을 줄을 대면, 좀 더 나은 특권과 사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는 방식이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늘 그래왔듯 여전히 '돈과 권력' 그리고 그것을 잇는 끈에 의해 움직인다.

예컨대 우리는 가족이 아파 병원에 가게 되면 '아는 사람'을 먼저 찾는다. 그래야 없던 병실도 생기고, 더 좋은 의사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한민국의 모든 영역이 그렇다. 상식과 시스템을 믿지 않는다. 학연, 혈연, 지연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돈을 쓰고, 권력에 줄을 대고 끈을 잇는다.

비리는 사회를 내부에서 갉아먹고 무너뜨린다. 한 사람이 돈을 쓰면 나도 돈을 써야 하고, 누군가 권력에 줄을 대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애써 우리 발 밑을 보지 않으려 했다. 이제는 우리가 발딛고 사는 이곳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위 아래, 위위 아래아래까지 부패고리로 얽혀 있다. 청렴결백의 표상은 눈을 씻고봐도 없고 작금에 위정자들이 벌이는 아사리판을 보고 있자니, 청음 김상헌이나 그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한 벼슬아치 같이 청백리에 빛난 분들이 애타게 그리워지는 게 비단 나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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