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 사이에 ‘적정 거리’가 확보되지 않으면 수목은 생존경쟁에 내몰려 볼품없게 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동식물에 자신의 영역이 있듯, 우리에게도 ‘개인 공간’이 있어 무의식적인 경계선을 갖는다. 만원버스나 붐비는 전철 안에서 타인과의 거리에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진=인터넷커뮤니티

[뉴스워치=김웅식 기자] 잔디밭 벤치 앞에 비둘기 떼가 모이를 쪼고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을 졸졸졸 따르고 있지 않는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모이를 쪼고 있는 비둘기와 부닥칠 것 같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비둘기와 나 사이에 안전거리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산은 나무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룬다. 숲은 가까이 서기도 하고 멀찍이 떨어지기도 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지혜로운 거리는 사람과 사람,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조망에도 필요한 것이다. 삶을 윤택하게 하는 아름다운 ‘거리 두기’를 떠올려 본다.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을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안도현 詩 ‘간격’ 

나무들 사이에 ‘적정 거리’가 확보되지 않으면 수목은 생존경쟁에 내몰려 볼품없게 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동식물에 자신의 영역이 있듯, 우리에게도 ‘개인 공간’이 있어 무의식적인 경계선을 갖는다. 만원버스나 붐비는 전철 안에서 타인과의 거리에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떤 작가에 따르면, 적절한 개인 공간은 나라별, 문화별로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벼운 포옹과 키스 등이 허용되는 ‘접촉 문화권’에선 좁고, 신체적 접촉을 금기시하는 ‘비접촉 문화권’에선 상대적으로 넓다. 비접촉 문화권인 아시아·중동 지역에선 낯선 사람과는 100㎝, 지인과는 80㎝, 친밀한 사람들과는 40㎝ 정도를 적당한 거리로 여긴다고 한다.  

개인 공간의 문제는 물리적 거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적정 거리를 유지한다고 해도 상황에 따라 불편과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행위에 대한 심리적 거리가 더 중요해 보인다. 그의 활달한 성격 너머에 쉬 상처 받는 여린 심성이 있음을 잘 안다. 상대를 배려하는 이런 마음이 있을수록 감정의 손상 없이 개인 공간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끈을 밀어보기도 하고 당겨보기도 한다. 밀어내면 멀어지고, 당기면 가까이 와서 들이민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아야 행복할 수 있다. 삶의 거의 모든 문제는 ‘거리 조절’에 실패했을 때 벌어진다.

독서를 사랑한 세종대왕은 임금이 된 지 8년째 되던 해 ‘사가독서(賜暇讀書)’라는 제도를 만든다. 집현전 학자들이 일정 기간 업무의 부담을 갖지 않고 독서할 수 있도록 휴가를 내려준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신하이고 학자라도 몇 년 동안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제대로 책 읽을 여유가 없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장하면서 집 밖 외출이 제한되고 사람 만나는 게 힘든 상황이 되었다. 뜻하지 않게 생긴 시간적 여유가 자기계발을 위한 소중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 집이든 지하철이든 책을 펴들면 그곳은 바로 나만의 서재가 된다. 책을 붙잡는 것은 세상을 붙잡는 일이고, 책을 읽는 것은 다른 이들을 만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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